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 E-저널 2022년 ISSN 2465-809X(Onl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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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저널 2022년 ISSN 2465-809X(Online)

제 58호(8-9월) |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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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신장이 작성일22-09-22 16:20 조회81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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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충남대학교 초빙교수 신장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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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 론


  위 사진은 1937년 일제 강점기 기간 중 소련 인민위원회 및 공산당 중앙위원회 결정(1937년 8월 21일)에 따라서 극동 지역에 거주하고 있던 모든 고려인들이 카자흐 공화국 및 우즈베크 공화국 등지로 강제이주 되었던 경로(붉은 실선)를 보여 주고 있다. 강제 이주 경로는 1937년 9월 9일 시베리아 횡단철도가 이용되었고 블라디보스톡을 출발하여 한달 뒤인 10월 9일 첫 정착역인 카자흐스탄 우슈토베역에 도착하였으며 열차 이동거리는 약 6,500km 였다. 이후 크즐오르다, 타쉬켄트, 우즈베크 등지로 분산 정착하였다. 열차의 환경은 매우 열악하여 기차별 객차 54량, 위생객차 1량, 식당차 1량 등으로 구성되었고 대체로 화물열차가 이용되었으며 총 이주 인원은 17~20만명 이었다. 이동과 정착 과정 중 부실한 식사와 불결한 위생 상태, 식수 부족, 의료지원 부족 등으로 추정된 사망자는 9,000~25,000여명이었다.​1​

 

  필자는 최근 8.14~19일까지 5박 6일간 여성가족부와 한국청소년활동진흥원이 주최/주관하고 사)한국역사문화원과 대한해협 전승 기념사업회가 수행기관이 되어「2022. 청소년 국외 역사 체험활동」단장으로 국내 고등학생 39명과 해군사관학교 생도 5명, 인솔자 5명 등 총 49명을 인솔하여 고려인의 강제이주 정착지인 카자흐스탄을 방문하였다. 역사체험단은 고려인 첫 정착역인 우슈토베, 홍범도 장군이 마지막 생애를 보낸 크즐오르다, 고려인 후손이 가장 많은 지역인 알마타 지역을 방문하였다. 체험단의 대부분 학생들은 척박한 환경의 정착지와 당시의 생활상을 접하면서 동시에 한민족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높은 교육열과 근면함으로 성실히 살아가고 있는 후손들을 보면서 아픈 역사와 함께 한민족으로서 자랑스러움을 동시에 느꼈다는 소감을 피력하였다. 

  따라서 이 글의 목적은 당시 조국을 떠나 이국땅에서 정착할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상황을 살펴 보고 필자의 역사체험을 통해 접한 현장을 사진과 함께 아픈 역사를 되새겨 봄으로써 다시는 이런 비극적인 상황이 발생하지 않도록 현재의 안보상황을 되짚어 보고「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라는 문구를 마음 속 깊이 새겨 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2. 극동 이주의 시대적 상황


  먼저 이들은 왜‘고려인’,‘고려사람’으로 불리고 있는 가를 살펴 보자. 현지에서 체험단을 위해 특강을 한 이봉주 교수는“현재 고려인의 명칭은 구소련 지역에 사는 한민족을 지칭하는 용어로 이들 스스로 고려인, 고려사람으로 칭하고 있다.” 라고 설명하였다. 특강 자료에 따르면 고려인들은 중국의 조선족이나 일본의 재일동포와 마찬가지로 우리 역사의 질곡을 딛고 자신들의 운명과 미래를 개척해 온 한민족 해외개척자들의 표상이라 할 수 있다고 정의하였다. 고려인이라는 용어는 1937년 중앙아시아 강제이주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하였고 국내 학계에서는 일반적으로 강제이주를 전후하여‘한인’과‘고려인’으로 구분해서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또한 고려인의 대부분이 과거 고구려가 위치했던 한반도 이북 지역 출신인 것에 기인해서 오늘날 스스로를‘고려인’,‘고려사람’이라 칭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편 일반적으로 사할린의 한민족은 이주 시기나 출신지역의 차이로 인해 ‘고려인’대신에 일반적으로‘한인’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3

  그러면 언제부터 어떠한 이유로 국경지역을 이탈하여 극동 지역에 이주하여 살았는가를 시대적 상황과 함께 살펴 보기로 하자. 이 교수에 따르면 연해주의 지신허라는 마을에 첫 이주가 시작된 시기는 1865년경으로 약 60여 가구가 정착하였다. 이듬해에는 100여 가구에 이르렀고 1867년 1월 현재 연해주에 약 1,000여명의 한인들이 거주하였으며 1869년 조선 북부의 홍수와 기아로 11월말에서 12월초 시기에 약 4,500여명의 한인들이 대거 이주해 왔다는 것이다. 이 시기를 시작으로 러시아 인구 조사에 따르면 일제강점기 이후인 1914년경 무렵에는 총 64,309명이 거주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당시 조선의 시대상황을 살펴 볼 때 독립활동가를 포함한 많은 수의 한인들이 비공식적으로 국경을 이탈하여 거주한 것으로 짐작하면 거주 인원은 이 수치를 훨씬 상회할 것으로 보고 있다.

  이주의 원인은 삼정문란​4, 탐관오리 횡포와 폭정, 군 복무의 어려움, 비옥한 토지를 보유한 러시아 연해주 지역의 지리적 근접성, 당시 자연재해로 인한 기근 등 복합적으로 작용한 듯하다. 특히 이 시기 주목되는 사건은 1862년 조선 철종 13년에 발생한 진주농민항쟁이다. 당시 진주의 백성들이 중앙에 납부해야 하는 과도한 세곡(稅穀)에 항의하였으나 고쳐지지 않고 오히려 탐관오리들의 횡포가 더해 졌으며 이에 대한 불만으로 진주를 이탈한 백성들의 세곡에 대한 부족분과 진주 관리들의 중간 착취분을 백성들에게 추가로 징세함으로써 불만이 폭발하여 진주권에서 2~3월에 농민들의 봉기를 시작으로 경상도 상주권에서는 3~4월에 항쟁이 일어 났으며 경주권에서는 10월에, 전라도권에서는 3월 27일 익산 지역을 시작으로 4~5월에 집중적으로 항쟁이 발생했고 충청도권에서는 5월에 발생하였으며 이후 제주도와 경기도 광주 일대까지 전국적으로 항쟁이 들불처럼 발생하여 당시 조정을 당황시키기도 했다. 이는 세곡을 바쳐야 하는 지역 일대 중심으로 발생하였고 농업을 주업으로 지탱한 조선경제 상황 상 매우 중차대한 사건이었으며 이 사건외에도 1800년대 조선에서는 농민의 봉기가 빈번했던 것을 보면 백성들의 궁핍하고 빈곤한 생활상은 당시 조정에 대한 큰 불만으로 작용 되었을 것이다. 특히 조선 북부지역은 지리적 특성상 농업이 어려운 특성을 갖고 있어 여기에 자연재해까지 겹치게 되면 살기 위해서라도 국경을 이탈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하였으리라 짐작된다.

  고종이 즉위한 1863년 이후부터는 정치적 상황이 백성들의 어려움을 더욱 가중 시켰다. 이 시기는 아시아에 대한 제국주의 침략 사건들이 발생하였다. 1866년 천주교도에 대한 병인박해 때 프랑스 신부가 처형된 것에 보복으로 프랑스가 2차례나 강화도 인근 해역을 침범한 병인양요가 있었으며 1871년에는 미국이 5척의 군함과 병력 1,200여명을 이끌고 강화도에 들어와 통상을 요구하다 조선 측의 강력한 대응으로 물러났으며 이 두사건을 계기로 조선은 척화비를 세우는 등 쇄국정책을 더욱 굳건히 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조선시대의 백성들을 더욱 어렵게 만든 사건은 1876년 일본과 강화도 조약을 맺은 이후 부터다. 이 조약은 일본의 군사력을 동원한 강압에 의해 체결된 불평등 조약으로 주요 항구를 개항하고 일본의 치외법권을 인정하며 조선 연안에 대한 자유로운 측량과 일본 화폐의 통용과 무관세 인정 등 일본의 조선에 대한 식민주의적 침략의 시발점이 되었다. 이후 1882년 군제개혁으로 인한 불만과 군료의 부당한 지급에 반발한 군인들의 반란으로 발생한 임오군란이 있었고 일본은 이를 빌미로 제물포 조약을 맺고 조선의 치안주권에 대한 무시와 일본의 군 병력을 조선에 주둔 시킨다는 정당성과 피해 보상과 사죄를 요구하는 등 제국주의적 굴레를 조선에 씌움으로써 자주국가로서의 위신과 체면을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이후 1894~1895년 사이에 일어난 청일전쟁과 1904~1905년 러일전쟁은 조선의 지배권을 두고 일본이 일으킨 제국주의 전쟁​5이 발생하였다. 여기에서 승리한 일본은 1905년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기 위해 강제로 을사조약을 체결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일본은 한국을 보호국가로 삼으려는 외교적 노력에 집중하여 미국과 영국으로부터 묵시적 양해를 받아냈다. 이때 전국적으로 의병이 일어났으며 구국계몽운동 등 문화운동을 표방한 국민 계몽 노력이 전개되었고 산하에 비밀결사를 두고 항일구국운동을 전개하기에 이르렀다.​6 

  홍범도 장군이 의병을 일으켜 연해주 일대에서 독립활동을 시작한 것도 바로 이 시기이다. 1895년경부터 의병에 뛰어들어 함경북도 갑산, 무산 등지 일대를 중심으로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1907년 전국에서 일어난 의병에 자극을 받아 같은 해 11월 갑산에서 산포대를 조직하여 의병을 일으켰다. 삼수·갑산 등지에서 유격전을 펼치다가 만주로 건너가서 독립군을 양성하였다. 그러나 그 무렵에 부인과 아들을 모두 잃었다. 1910년 한일 병합 후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군 양성에 힘썼으며, 1919년 간도 국민회의 대한 독립군 사령관이 되어 국내로 들어와서 일본군을 습격하였다. 후에 독립군의 통합 운동을 벌여 대한독립군단을 조직, 김좌진과 함께 부총재가 되었다. 1920년 일본군이 봉오동을 공격해 오자 3일간의 봉오동 전투에서 120명을 사살하며 최대의 전과를 올렸고, 이어서 청산리 대첩에서 김좌진의 북로군정서군과 함께 일본군을 대파하였다. 간도 참변과 자유시 참변을 겪은 그는 만주로 건너가기 전에 가족들이 모두 죽고 없었는지라 한반도로 돌아오지 않고, 연해주에 머물렀다. 1922년에는 모스크바에서 열린 국제공산당(코민테른) 국제대회에 국제공산당이 지휘한 원동(遠東)의 식민지·반식민지 혁명가로 참석한다. 1927년 볼셰비키당에 입당하였으나, 1937년 스탈린의 한인 강제이주 정책에 의해 연해주에서 카자흐스탄 크질오르다로 강제 이주당했다. 크질오르다로 옮겨온 그는 거기서 집단 농장을 운영하기도 했고, 말년에는 고려극장의 관리인으로 일하며 여생을 보내다가 1943년에 향년 76세의 나이로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하고 이국땅에서 쓸쓸히 여생을 마쳐야 했다. 이후 크질오르다의 한 공동묘지에 안장되었고, 2021년 8월 15일에 대한민국으로 유해가 봉환되어 8월 18일 국립대전현충원에 다시 안장되었다.​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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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질오르다 지역의 홍범도 장군 흉상과 가묘역, 추도식을 마친 역사체험단)

 

  일제는 1910년 8월 29일 대한제국의 주권을 완전히 강탈하고 식민지로 강점하기 위해 조선총독부를 설치하고 총독은 반드시 육군과 해군의 대장으로 임명하여 한국을 일본군부의 지배하에 두는 무단통치 방식을 채택하고 헌병과 일본 육군 제19사단을 주둔시켜 한국에 대한 식민지 무단폭압통치체제를 만들었다. 이 시기를 전후하여 뜻있는 많은 전국의 의병들이 일제의 탄압을 피해 만주와 연해주 일대로 이동하였으며 이후 1919년 3.1만세운동이 일어나기 전까지 약 10여년간 만주와 연해주 지역에 흩어져 있던 한인 동포들의 지원을 받아 독립군을 재건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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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대 전후 독립군 활동 지역)

 

3. 강제 이주의 원인과 중앙아시아 정착

 

  조국을 잃은 설움과 배고픔, 그리고 이국땅에서 탄압과 모욕 속에서도 한민족 특유의 성실함과 농경민족의 근면함으로 연해주 일대를 옥토로 일구어 정착한 지 약 70여년 만에 스탈린의 소수민족 탄압과 강제이주 정책으로 인해 1937년 9~10월 일거에 다시 한번 삶의 터전에서 쫓겨나게 된다. 조선시대에는 관리의 압정과 약탈, 정부의 무능함으로 인한 주권 상실로 국경을 넘어왔지만 이제는 그마저도 강제로 이주를 당하여 중앙아시아 척박한 땅 카자흐스탄으로 오게 된다.

  강제이주의 원인은 ① 일제의 극동 및 만주 진출에 따른 소련의 태평양 지역의 안보 우려 속에 국경지대 거주하고 있는 한인의 존재에 대한 부정적 인식(일본인과 비슷한 한인의 존재를 스파이로 여김), ② 한인들의 연해주 일대 경작 능력을 확인하고 그들의 우수한 농업적 기술을 이용한 중앙아시아 지역 농지 개발 및 식량의 확보​8 등이 작용하였다.  

  강제이주 직전에는 한인 사회주의자와 지식인 등 지도급 인사 2,500여명 정도가 체포되어 총살형을 당하였다. 이는 표면적으로는 반소비에트 활동과 간첩행위라는 명목이었으나, 소련 당국의 강제 이주에 따른 불만을 사전에 잠재우고 정당성을 확보하여 강제이주에 따른 부작용을 최소화 하기 위한 것으로 추측된다. 한인 강제이주 직전에는 백러시아 지역의 폴란드인 35,000여명, 그루지야 지역의 쿠르드족 1,300여명, 우크라이나 지역의 독일인 10,000여명, 이란계 6,000여명을 이주시켰다. 1937년 10월 25일 종료된 한인 강제이주는 총 124개 객차에 171,781명(36,442가구)이 이주하였으며 이중 우즈베크로 76,525명, 카자흐로 95,256명이 분산되었으며 11월 1일 추가로 약 700여명 가량이 남아 있다고 소련의 내무인민위원 예조프가 위원장인 몰로토프에게 보낸 총 결산보고서에 기록되었다.​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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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자흐스탄 첫 기착지인 우슈토베 역에서 약 2km 떨어진 최초 정착지의 기념석)

 

  카자흐스탄에 정착한 고려인들은 최초 소련당국이 약속한 연해주에 남기고 온 재산과 농작물, 농기구, 가축 등 물질적 지원과 보상은 제대로 받지 못했다. 현지의 당국이나 소비에트 기관들의 특별 이주 한인들에 대한 정착 대책에 대한 융통성도 부족했고 무엇보다 중앙정부로부터 자금 및 농기구 지원이 늦어져 초기 정착에 어려움을 겪었다. 그래서 고려인들은 집을 지을 자재가 없어 토굴을 짓고 살았으며 멀리 떨어진 지역의 수로를 끌어다 염분 덩어리인 토지를 개간하는 데 애를 먹었다. 반면 당시 토착민인 카자흐 농민들의 도움과 배려가 있었으며 지금도 거주하는 고려인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남아 있으며 이에 대한 행사를 지속적으로 펼쳐 우호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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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거주지 토굴입구 모형과 한·카자흐간 우호 기념문)

 

   정착한 고려인들은 성실함과 근면성을 바탕으로 극동에서 처럼 곧바로 콜호즈(집단농장) 조직에 착수했고 중앙아시아 전 지역에서 거의 동시에 이러한 조직이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1939년 11월 초 카자흐공화국에는 61개의 고려인 집단농장에 6,732가구, 7개의 협동농장에 806가구, 8개 어업집단농장에 22가구, 도시와 농촌의 기관 및 기업에 5,945가구의 강제 이주자들이 정착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중 칠리지구에 있는 선봉 콜호즈는 김만삼이라는 특출한 벼재배 전문가가 있어 지역의 특성에 맞는 방법으로 논을 개간하여 높은 수확을 거두어 엄청난 농업생산력 증대와 기부금을 통해서 지역사회에 기여 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고려인들의 헌신적인 노력은 소련 당국의 인정을 받았으며 1946~47년 사이에 우수한 노동메달을 받은 전체 3,861명 중에서 1,000명 이상이 고려인이었을 정도로 최고의 농업전문가라는 인정을 받았다. 

  또한, 이렇게 성공한 콜호즈를 중심으로 문화생활의 수준도 점차 나아져 갔다. 학교가 생겼으며 병원과 탁아소, 공원 등을 조성하고 생산성 높은 농기구 들도 보유하게 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한민족의 정체성을 잊지 않기 위해 한글로 만들어진 고려일보가 지금도 발간되고 있으며 고려극장을 중심으로 전통 공연과 예술의 명맥을 이어 왔고 세시 풍속의 경우, 설, 한식, 단오, 추석, 동지 등이 큰 명절로 지켜지고 있다. 특히 교육은 초기 연해주 정착 시기부터인 1860년대 후반부터 시작되어 많은 민족학교 등이 생겨 났고 강제 이주시에도 많은 교육 서적을 카자흐스탄 거주지로 옮겨와서 고려인 최초로 설립된 코쉬카르바예프 학교에는 지금도 고문서들을 보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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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쉬카르바예프 고려인 학교와 보관 중인 조선시대 고문서)

 

  주카자흐스탄 대사관 자료(2007년)에 의하면 고려인들의 높은 교육열은 전문학교 이상 진학률이 50% 이상으로 정계와 학계, 의학계 등 전문직과 사무직 종사자가 48%에 달하고 과거 고려인들의 주 업종이던 농업 인구는 5%에 미치지 못한다고 한다. 또한 경제분야에서 건설업계 2~3위가 고려인 업체이며 전자 제품 유통업은 1~3위를 차지하고 자산규모 6위인 은행이 고려인 소유이며 세계적 구리 생산 업체의 경영진은 고려인이 주류를 이루고 있을 정도로 높은 위상을 차지하고 있다고 한다.

 

4.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1392년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고 정확히 200년 뒤 1592년 ~ 1598년 임진왜란을 맞았다. 이이는 십만양병설을 주장하고 왜침에 대비하자고 주장하였으나 국가 재정의 허약과 국방체제의 미비, 서인과 동인으로 갈라진 정쟁으로 인한 국제정세 판단의 결여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왜침에 의한 국란을 초래하였다. 서애 유성룡은 징비록(懲毖錄)을 작성하여‘미리 징계하여 후환을 경계한다’는 의도에서 자신이 겪은 임진왜란의 원인과 전황을 자세히 분석하여 후대에 경계하였다. 같은 역사를 되풀이 하지 말라는 경고였다. 그러나 조선은 불과 44년 뒤 갖춰야 할 국방력은 뒤로 한 채 불필요한 명분과 의리에 급급해 변화하는 중국 정세를 파악하지 못하고 1636~37년간 중국 통일의 야욕을 가지고 있는 청나라 태종에게 삼전도(지금의 송파)의 굴욕을 당하였다. 그리고 1910~1945년의 35년간 일본 제국주의에 의하여 식민통치를 당하는 일제강점기를 맞았다.

  불행한 역사를 더 이상 되풀이 할 수 없다. 현재의 안보정세를 살펴 보자. 북한은 더 이상 핵을 포기할 의사가 없음을 확인했고 고도화 되어가는 핵과 투발수단인 미사일과 잠수함을 개발하고 있다. 중국은 대만 문제와 남중국해 내해화 시도를 위해 지속적으로 해군력과 공군력, 미사일 능력을 강화하고 있다. 2035년경이면 항공모함 6척 건조를 통하여 최소 6개의 항모전투단 확보를 목표로 전력을 확보하고 있다. 중국의 해군력 강화와 지역 해양안보에 대한 위해 활동은 대한민국의 안보는 물론이고 생사가 걸린 문제이다. 원유와 모든 수출입 통로인 남중국해의 해로가 막히면 수출입으로 성장하는 한국의 경제활동이 불가능하다. 

  일본은 쿼드 안보협력체를 중심으로 미국을 등에 업고 중국과 한국을 견제하고 있다. 미국이 지역 안보협력을 강조해도 한국과의 협력에는 안중에 없는 듯하다. 그만큼 일본의 정치·외교적 입지와 자위대의 위상이 강화되어 있고 미국이 대중 문제에 있어 일본에 거는 지역 안보협력의 기대는 그 어느 때보다 크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국과는 위안부 문제, 강제징용 사법처리 문제와 특히 독도 문제에 있어 한치의 양보도 없다. 한국이 우선 사과해야 협력이 가능하다는 적반하장식 외교적 입장을 내놓고 있으며 독도에 관하여는 한국의 정당한 해양조사선 활동에도 제동을 걸고 중등교과서와 방위백서에도 여전히 독도는 일본 땅임을 주장하고 있다. 일본은 독도를 포함한 자국 영토의 12배 이상 되는 해역을 배타적경제수역으로 지정하고 해양영토를 확대하고 있으며 중국과는 대만문제와 센카쿠 열도 영유권 문제 등 분쟁에 대비하여 최근 이즈모 대형수송함 2척을 F-35B 탑재 가능한 갑판으로 개조하는 등 해상자위대 능력 강화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대한민국은 현정부가 한미동맹을 기반으로 새로운 대중국, 일본과의 관계를 모색해 나가고 있으나 쉽지 않은 현실에 부딪히고 있다. 정치·외교적 협상 능력은 강력한 국방력이 뒷받침 되어야 한다. 최근 KF-21 한국형 초음속 스텔스 전투기가 시험비행을 하였고 폴란드에는 K2 전차, K9 자주포, FA50 경공격기 등을 수출 계약을 맺었으며 호주와 노르웨이 등에도 레드백 장갑차, K2 전차 등 외국에 한국의 무기에 대한 수출 기대가 높을 정도로 자주 국방력이 강화 되었다. 아쉬운 점은 주변국 해군력 강화에 비해 한국의 해군력이 미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새로운 해군전력의 확보는 10년을 바라보는 장기간 사업이다. 그만큼 미래 안보상황을 예측해야 하는 것이다. 지금은 당장 눈앞에 있는 북한 핵과 미사일 억제 능력을 보유해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미래 안보 환경의 변화와 위협에도 대처해야 하는 것이다. 여기에 해군력 증강의 현실적 어려움이 있는 것이다. 최근 보도된 한국의 경항모 확보를 위한 2023년도 예산(안) 미반영 소식은 이러한 점에서 아쉬운 점이 크다. 과거 선조들의 불행한 역사를 되풀이 할 수는 없다. 

  유엔해양법 협약이 발효된 1994년 이후 새롭게 획정되어야 할 바다의 경계선인 배타적경제수역(EEZ)은 한·중·일간 결정되지 않았으며 일본은 독도를 여전히 자국 땅이라 주장하고 있다. 중국은 우리의 해양과학기지가 설치된 이어도를 포함한 경계선을 자기의 바다라 주장하고 있으며 우리의 해상교통로 길목인 남중국해와 대만 인근 해역의 가시화된 분쟁으로 인하여 예견되는 해상봉쇄 상황은 우리 경제와 안보에 큰 악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높다. 또한 해저에 원유가 매장되어 있는 제주도 남쪽의 7광구는 일본의 비협조로 개발되지 못하고 있음은 물론 한·일간 협정이 종료되는 2038년이면 중국도 자국 대륙붕의 연장임을 주장하여 소유권을 요구할 것이다. 앞으로 그 어느 때보다 한반도 주변 해역의 해양안보 환경은 험난이 예상된다. 비록 전쟁을 피하기 위한 정치·외교적 협상 노력도 강력한 군사력이 뒷받침 되어야 가능할 것이다. 곧 다가올 2038년 제주도 남쪽 바다에서 7광구 인근 해역을 서로 자국의 소유라고 주장하는 가운데 각국의 해군 전력이 집중된다고 상상해 볼 때 우리 대한민국 국방부와 합참은 중국과 일본에 맞서기 위해 어떠한 전력을 배치하여 전쟁을 억제하고 정치·외교적 협상력을 높일 것인가?

 

 

 

 

<각주>

1) 고려인 정주 85주년 2022. 청소년 국외 역사체험활동 참고자료(2022. 8. 14.)

2) 체험단의 목적은 ①나라사랑의 정신, ②한민족의 자부심과 긍지, ③미래에 대한 자기 설계 등으로 설정하고 활동하였다.

3) 알파라비 카자흐 국립대학교 동방학과 학과장으로 재직, “CIS 고려인의 150여 년의 역사와 문화” 역사체험단 특강 자료(22.8.14)

4) 조선 재정의 주류를 이루던 田政, 軍政, 還政 세가지 수취체제가 변질되어 부정부패로 나타난 현상

5) 1905년 러시아와의 전쟁 승리를 확신한 일본은 이 시기에 독도를 다케시마로 고치고 2월 22일에 시마네 현에 귀속시킨다. 이후 2005년 일본 시마네현에서 2월 22일을 다케시마의 날로 지정하는 조례안을 가결시키고 매년 독도 도발 행사를 개최한다. 

6)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42958(검색일 : 22.8.27)

7) https://ko.wikipedia.org/wiki/%ED%99%8D%EB%B2%94%EB%8F%84(검색일 : 22.8.27) 1963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으며 2021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8) 스탈린은 1927년 말 소련 공산당 제15차 당대회에서 농업집단화 정책을 천명, 콜호즈(집단농장), 소프호즈(국영농장) 체제로 전환하는 정책을 시행. 특히, 1933~35년 사이 소련 전역에 대기근이 확산되어 식량공급 문제가 첨예한 과제로 대두. 이병조, “CIS 고려인의 150여 년의 역사와 문화” 역사체험단 특강 자료(22.8.14)

9) 상게서, p.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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