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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2호(12-1월) | 지록위마 함정과 국가안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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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임익순 작성일20-01-14 14:59 조회1,24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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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록위마(指鹿爲馬) 함정과 국가안보


충남대학교

교수 임익순

 

 

  사슴은 결코 말이 될 수 없다. 사람들은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고 하는 명백한 거짓말 앞에서 자기의 입장을 정하지 못하고 우왕좌왕하게 된다. 힘 있는 사람이 하는 거짓말이기 때문이다. 힘 있는 사람이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고 하는 순간 모두가 함정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정치가들은 국가의 안위라는 중차대한 문제를 두고 개인이나 특정 집단의 권력을 위해 흥정해 왔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은 오랫동안 우리에게 경종을 울려주었다. 그러나 권력을 손에 넣고 오랫동안 유지하고자 하는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국민을 질곡의 지록위마 함정에 몰아넣는 역사는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다. 

  기원전 221년 아시아에서 가장 큰 땅덩어리에 산재한 여러 제후국가를 평정하고 세워진 중국 역사 최초의 통일국가인 진(秦)나라는 기원전 206년에 멸망하였다. 진나라는 강력한 법의 집행을 앞세워 화폐와 도량형(度量衡)을 통일하고 만리장성의 축조와 무기, 운송체계 등의 발전을 이루었다. 이렇게 통일되어 강성한 나라가 왜 왕조로서는 매우 짧은 기간인 15년 만에 멸망하였는가? 진나라가 멸망한 원인의 중심에는 권력을 장악하고 황제의 지위에 오르려는 환관 조고의 지록위마 함정이 도사리고 있다.

  진나라를 세운 뒤 스스로 최초의 황제에 오른 시황제 영정(嬴政)은 법가(法家)를 중시하여 옥사(獄事)와 관련된 법에 능통할 정도로 영민했던 희대의 간신이자 환관 내시인 조고를 신임하였다. 기원전 210년 시황제는 승상 이사와 조고를 대동하고 지방을 순행하던 중 병사하며 유언장을 남겨 태자 부소를 2세 황제로서 후계를 잇도록 하였다. 조고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권력을 장악하고자 승상 이사를 교사(敎唆)하여 유언장을 위조함으로써 시황제의 맏아들인 태자 부소와 명장 몽염을 자결하게 하였다. 현명한 부소보다 용렬(庸劣)한 호해가 다루기 쉬웠기 때문에 호해를 2세 황제 자리에 앉혀놓고 자기 마음대로 조종했다. 또한, 평소 정사에는 별 관심이 없었던 황제 호해에게 거짓 참소하여 승상 이사를 죽이고 스스로 그 자리에 앉아 횡포와 만행을 저질렀다. 이사가 죽은 후 진나라의 권력은 이제 완전하게 조고의 수중으로 떨어졌다. 역심(逆心)이 생긴 조고는 중신들 가운데 자기에게 반대하는 사람을 가려내기 위해 호해에게 사슴을 바치면서 이렇게 말했다. “폐하, 말(馬)을 바치니 거두어 주시오소서.” “승상은 농담도 잘 하시오. ‘사슴을 가지고 말이라고 하다니(指鹿爲馬)’…‥. 어떻소? 그대들 눈에도 말로 보이오?” 말을 마치자 호해는 웃으며 좌우의 신하들을 둘러보았다. 잠자코 있는 사람보다 ‘그렇다’라고 긍정하는 사람이 많았으나 ‘아니다’라고 부정하는 사람도 있었다. 조고는 부정한 사람을 기억해 두었다가 나중에 죄를 씌워 죽여버렸다. 그 후 궁중에는 조고의 말에 반대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천하는 오히려 혼란에 빠졌다. 각처에서 진나라 타도의 반란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천하의 군웅들이 쳐들어와 진나라의 형세가 위태롭게 되자, BC 206년 2세 황제인 호해를 모살(謀殺)하고 부소의 아들 자영을 옹립하여 진왕이라 부르게 하였다. 그러나 조고는 곧 자영에게 죽임을 당하고, 그의 3족도 함께 처형당했다. 자영은 재위 46일 만에 유방에게 항복함으로써 진나라는 통일 이후 3대 15년 만에 멸망하고, 뒤이어 쳐들어온 항우에게 잡혀 죽었다. 결국, 진나라는 조고가 만든 지록위마 함정에 빠져 4년여 동안 전쟁의 화마에 싸여 멸망의 길을 걷게 되어 기원전 202년 유방에 의해 한나라로 왕조가 바뀌게 된 것이다.

  이러한 역사는 조선에서도 재현되었다. 일본의 침략 의도를 제대로 읽지 못하고 대비를 소홀히 하다가 전 조선반도와 백성이 7년 동안 전쟁의 화마에 싸여 고통받게 된 것이다. 여기에도 권력의 속성이 반영된 지록위마 함정이 숨어 있다.

  조선 조정은 일본을 통일한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침략이 현실화할 우려가 커지던 1590년 3월, 일본의 거듭된 요청과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의중을 파악할 필요가 있다는 판단에 따라 통신사를 파견하였다. 당파로 분열된 정권을 과시하기라도 하듯이 소수파인 서인 황윤길을 정사로 하고 다수파인 동인의 김성일을 부사로 하는 통신사였다. 이들은 10개월 후인 1591년 1월에 귀국하여 일본의 정세와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의중을 보고하였다. 

  왜국의 사신 평조신 등과 함께 돌아와 그간의 실정과 형세를 치계하면서 황윤길은 “필시 병화가 있을 것이다.”라고 보고하였다. 그러나 김성일은 “그러한 정상을 발견하지 못했는데, 황윤길이 장황하게 아뢰어 인심이 동요하게 되니 사의에 매우 어긋납니다.”라고 보고하였다. 토요토미 히데요시에 대한 선조의 질문에도 황윤길은 “눈빛이 반짝반짝하여 담과 지략이 있는 사람인 듯하였습니다.”라고 하였고, 김성일은 “그의 눈은 쥐와 같았는데 두려워할 위인이 못됩니다.”라고 하였다. 똑같이 본 것을 정반대로 말한 것이다. 더구나 그들이 가져온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국서에 정명가도(征明假道)에 대한 분명한 내용이 있었는데도 한 사람은 전쟁이 있을 것이라고 하였고 한 사람은 전쟁은 없다고 한 것이다. 서해 유성룡 조차 깜짝 놀라서 편전을 나와 “병란이 있으면 어찌 하겠느냐”고 따져 묻자 김성일은 “어찌 왜적이 끝내 동병(動兵)하지 않을 것이라고 단언하겠습니까. 다만 황윤길의 말이 너무 지나쳐 중앙과 지방의 인심이 놀라 당황할 것을 걱정해 이를 해명했을 뿐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더욱 황당한 것은 선조와 당시의 집권세력, 즉 유성룡과 김성일 등이 포함된 동인 세력이 전쟁이 없었으면 하는 희망사항이 담긴 김성일의 거짓 보고를 채택하여 곧 닥칠 전란에 대비하지 않았던 것이다.

  김성일의 지록위마 함정에 빠진 조선의 조정과 백성은 1년 뒤인 1592년부터 임진왜란이라는 전쟁의 구렁텅이에 빠져 7년 후에나 간신히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지록위마 함정에서 빠져나오기는 했지만 이후 조선의 국력은 피폐해 질대로 피폐해져 쇠퇴의 길로 접어들게 되었다.

  현대로 접어들어 지록위마 함정의 무대는 유럽으로 옮겨져 세계사적으로도 가장 참혹하다고 평가받는 2차 세계대전을 겪게 되었다. 세계적인 지록위마 함정을 만들었다고 지탄받는 장본인은 영국의 수상 네빌 체임벌린이었다.

  체임벌린은 1931년부터 1937년까지 재무상을 역임하며 1929년부터 시작된 경제 대공황을 타개한 유능한 정치가였지만 히틀러의 야욕을 무너뜨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1937년 수상이 된 체임벌린은 전임 수상인 스탠리 볼드윈의 대외정책 기조인 유화정책을 계승하여 히틀러와 무솔리니의 유럽 위기를 고조시키는 행보를 묵인하였다. 체임벌린은 이탈리아 파시스트당을 독일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게 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이에 따라 1938년 4월 16일 그는 에티오피아에 대한 이탈리아의 지배권을 인정했고, 이탈리아가 깊이 개입하고 있던 스페인 내전(1936~39)에서 영국군을 철수시켰다. 또한, 며칠 후인 4월 25일 영국의 방위력을 약화시킨다는 비판을 받으면서도 아일랜드에 있는 영국 해군기지들을 포기했다. 결정적인 체임벌린의 실수는 히틀러의 1938년 오스트리아 합병에 이은 체코슬로바키아의 주데텐란트 할양 요구에 대한 대응이었다. 1938년 9월 히틀러가 주데텐란트를 독일에게 양도할 것을 체코슬로바키아에 요구함으로써 전유럽에 전운이 감돌자, 체임벌린은 전쟁발발을 막아보기 위해 독일 뮌헨으로 갔다. 히틀러는 끝까지 주데텐란트를 요구했고, 체임벌린은 체코슬로바키아 내 독일인을 제외한 다른 소수 민족의 분리는 안 된다는 조건을 제시하여 영국과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 간의 뮌헨협정이 체결되었다. 9월 30일 조인된 뮌헨협정에 따라 체임벌린은 프랑스의 총리 에두아르 달라디에와 함께 히틀러의 거의 모든 요구를 들어주었으며, 체코슬로바키아를 무방비 상태로 남겨두었다. 영국과 프랑스가 받아낸 양보는 10월 1일 주데텐란트를 모두 접수하겠다는 독일의 요구를 타국 참관하에 10월 10일까지 하는 것으로 바꾼 것뿐이다. 영국과 프랑스는 전쟁에 대한 공포로 인해 체코슬로바키아를 팔아먹은 것이다. 평화를 지켰다며 열렬한 환영을 받은 체임벌린이 환영 군중들에게 흔들어 보인 종이는“독일은 더 이상 영토를 요구하지 않는다.”는 히틀러의 서명이 담긴 서약서였다. 이 종이를 흔들며 체임벌린은 “여기 우리 시대의 평화가 있습니다!”라고 외쳤다. 진정한 평화를 원하는 국민을‘거짓 평화’로 속임으로써 지록위마 함정을 만든 것이다.

  뮌헨협정으로 유럽에는 일시적인 평화가 왔지만, 결과론적으로 전쟁이 발발하는 시기만 1년 정도 늦춘 것이었을 뿐이다. 뮌헨협정이 체결된 1년 후인 1939년 9월 1일 독일은 폴란드를 침공하였고 이로 인해 이후 6년 동안 유럽 전역이 전쟁의 화마에 휩싸이게 되었다. 체임벌린이 시도한 문서에 의한 평화는 팽창주의적 전체주의 국가에게 양보를 해봤자 아무 소용이 없음을 보여주는 본보기가 되었다.

  현재의 한반도가 처한 안보환경은 어떨까? 우리 정부가 추진한 9.19 남북군사합의가 평화를 보장할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한 논의가 빗발치고 있다. 그 이유는 정치가들이 추구하는 문서에 의한 평화가 항구적이지 않다는 역사적 교훈이 있기 때문이다. 문서 하나로 전쟁은 없을 것이며 진정한 평화가 도래했다는 정치가의 말이 또 다른 지록위마의 함정에 국민을 몰아넣는 것은 아닌지 우려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2018년 9월 19일 양측의 국방수장이 평양 남북정상회담의 부속서로 군사합의안에 서명하였다. 이 합의의 핵심은 육해공 완충구역에서 일체의 적대행위를 중지하는 것이다. 이 합의 직후 대한민국 대통령은 평양 시민들 앞에서 한반도에 전쟁은 없을 것이며 평화의 시대가 열렸다고 말했다. 몇 번의 회담과 군사합의로 평화가 왔다고 한 것이다. 그로부터 1년 뒤 평화를 보장한다던 군사합의가 존폐의 기로에 섰다. 2019년 11월 23일 연평도 포격도발 9주년 당일에 서해 접경지역 창린도에서 김정은이 직접 해안포 사격을 지휘함으로써 합의는 파기되었다는 것을 보여 준 것이다. 2019년 ‘연말시한부’를 거론하면서 동창리 발사장에서 대륙간탄도미사일용 액체연료 엔진시험을 연속 강행하면서 고강도 도발위협을 지속하는 것도 더 이상 합의를 지킬 의사가 없다는 신호다. 핵무기를 손에 쥐고 있는 김정은의 말대로 평화는 강력한 군사력이 뒷받침하는 것이지 문서나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9.19 남북군사합의가 ‘거짓 평화’를 보여주는 지록위마 함정이 되어 우리 한반도에 전쟁의 화마를 불러오는 악마의 신이 될 것인지는 아직 판명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국가안보에 있어서 단 하나의 위협에도 대비를 해야하는 군의 안보태세가 무너져서는 안 된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야욕인 한반도의 공산화 통일이 변하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국방을 담당한 군의 대비뿐만 아니라 정치가의 태도도 안보위협에 대해서는 어떠한 양보도 없다는 자세가 필요하다. 전쟁은 없다고 단정하고 대비를 소홀히 하는 것보다는 전쟁은 있을 수 있다는 가정 아래 대비태세를 튼튼하게 갖추는 것이 올바른 국방 담당자나 위정자의 태도일 것이다. 문서나 합의가 가져다 주는 ‘거짓 평화’가 지록위마 함정이 되어 우리의 안보태세를 허물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우리를 공격하는 우를 범하도록 해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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