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역사가 한국에게 주는 시사점 (군의 역사를 중심으로) > E-저널 2020년 ISSN 2465-809X(Onl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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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7호(10-11월) | 영국의 역사가 한국에게 주는 시사점 (군의 역사를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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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이승준 작성일20-11-10 16:32 조회2,04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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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역사가 한국에게 주는 시사점

-군의 역사를 중심으로-


충남대학교 국가안보융합학부

겸임교수 이승준


Ⅰ. 서 론


 섬나라인 영국은 역사적으로 볼 때 바다를 통해 국가발전을 추구하여 왔다. 그 과정에서 왕실해군(Navy Royal)을 건설하고 이를 관리하기 위한 해군부(Navy Board)를 설치했다. 찰스 2세는 1660년 옥좌에 오르면서 154척으로 구성된 왕실해군을 물려받아 이것이 오늘날의 영국해군(Royal Navy)의 시초가 되었다(영국 국방부, Royal Navy History). 이후 영국은 제해권을 장악을 통해 국부를 달성하고 해가 지지 않는 대영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다. 국가생존과 번영을 위하여 바다와 해군을 중시한 영국의 역사적 전통은 오늘날까지도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

 6·25전쟁 이후 남북이 정전상태를 유지한 채 휴전선으로 분단된 한국은 지정학적으로 섬나라와 유사한 처지에 있다.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이후 정부의 지속적인 남북교류 및 화해협력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남북 간의 긴장은 좀처럼 해소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걱정스러운 상황이다. 이 사실은 국가생존과 번영에 있어 그만큼 바다가 중요하다는 것을 시사한다. 바다는 한국에 있어 생명선과 다름이 없다. 그러므로 한국의 안보는 곧 한반도의 주변해역뿐만 아니라 원·근해를 포함한 바다에서 국가이익을 달성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는 데 있음을 새삼 깨닫게 한다. 영국이 해군을 활용하여 제해권을 장악하고 바다경영을 통해 국부를 달성한 것처럼, 한국도 영국의 역사를 참고하여 바다를 통한 생존과 번영에서 국가부흥을 찾을 수 있도록 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Ⅱ. 영국의 역사와 영국군


 영국의 역사는 곧 영국해군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영국은 섬나라이기 때문에 바다는 항상 중요할 수밖에 없었다. 지정학적으로 볼 때 영국을 둘러싸고 있는 바다는 외부의 침략자에게는 방해물이며, 국제사회의 무역로이자 제국건설의 기초라 하겠다. 따라서 영국의 국가전략과 군사사상은 제해권 장악을 통해 자국 주도의 해상 무역체제 구축에 중점을 두었으며 이를 위해 국가적인 노력을 기울여 왔다(Azar Gat, 2017).

 영국의 헨리 8세(Henry Ⅷ)는 1509년 옥좌에 오른 후 재위 기간(1509~1547년) 동안 종교 개혁을 추진하면서 영국 국교회를 수립하였으며, 정치적으로 중앙집권화에 역점을 두었다. 그는 해양력의 중요성을 인식해 자신의 해군(Navy Royal)을 건설하였고 이를 관리하기 위하여 ‘해군부’(Navy Board)를 설치했다(영국 국방부, History of the Ministry of Defence). 왕실해군을 건설하는 과정에서 왕실 비용이 과도하게 발생하여 경제적인 어려움도 겪었지만, 결과적으로 영국해군은 1588년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격파하고 제해권을 장악하였다. 당시 지상군은 평화 시에는 쓰임새가 별로 없었지만 해군은 그렇지 않았다. 해군이 보유하고 있던 선박들은 전시에는 군함으로, 평시에는 상선으로 운용하고 있었으며, 유지비용도 지상군보다 더 낮았다. 이러한 이유들로 인해 해군은 절대왕권의 권력행사의 도구가 되지 않아 의회가 해군의 증강을 견제하지 않았기 때문에 더욱 크게 성장할 수 있었다. 이후 찰스 2세(Charles Ⅱ, 재위 기간 1660~1685년)는 1660년 옥좌에 오르면서 154척으로 구성된 왕실해군을 물려받았다. 그는 약화된 왕실의 통치권을 회복하고, 해군력을 강화하여 식민지 확장 등에 주력하였다(영국 국방부, Royal Navy History). 이렇듯 오랜 기간 이어진 영국 왕실의 해군력 건설 노력은 오늘날 ‘영국해군’(Royal Navy)을 탄생시킨 기반이 되었다.

 영국은 섬나라로서 국가의 생존과 번영을 바다를 통해서 달성하고자 하였다. 즉 국가이익이 제해권을 달성함으로써 보호되고 확대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에 따라 국가전략 및 군사사상도 강력한 해군력 건설과 이를 이용한 제해권 확보에 중점을 두었다. 그래서 영국의 왕들은 해군을 건설하는 데 힘써 왔고, 이들을 감독하기 위하여 해군성을 시작으로 초기의 국방조직을 설치하게 되었다(영국 국방부, History of the Ministry of Defence).

 영국의 이러한 역사적 전통은 오늘날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영국의 헌법 제121조에 따르면 영국의 군사력은 의회법에 의해 해군, 육군, 그리고 공군, 향토 및 예비군으로 구성하도록 하고 있다. 영국군은 병력규모에서는 육군과 공군이 해군보다 앞서 있지만, 각 군을 열거할 때는 해군을 제일 앞에 둔다. 이것은 국방부의 연례보고서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 문서에서 육·해·공군을 열거할 때 해군이 제일 앞에 등장한다(영국 국방부, Annual Report and Accounts 2003~2017). 이러한 사실은 영국이 역사와 전통을 존중함으로써 군 간의 갈등을 줄이고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또한 국방참모총장이 각 군에 대하여 군령권한을 행사하고 있지만, 국방부 내의 장성직위 및 합동군부대의 지휘관은 각 군에서 윤번제로 보직시킴으로써 군의 상부지휘구조가 3군의 상호견제와 균형발전이 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Ⅲ. 한국의 역사와 한국군


 1945년 8월 15일 일제의 치하에서 벗어난 한국은 1948년 7월 17일 헌법과 정부조직법(법률 제1호) 제정을 필두로 국가의 기틀을 쌓기 시작하였다. 이에 따라 국방부와 육·해군으로 구성된 한국군이 설치되었으며 국방부장관은 육·해군의 군정(軍政)을 장리(掌理)하도록 하였다. 이어서 1949년 10월 1일에는 국군조직법 제23조에 따라 육군 항공사령부를 모체로 하여 공군이 창설됨으로써 한국군은 육·해·공군의 3군 병립제를 취하게 되었다(국방군사연구소, 1995a). 그렇지만 당시의 한국군은 병력규모 면에서 매우 열악한 수준이었다. 1950년 6·25전쟁 개전 직전의 한국군의 규모는 105,752명으로 육군 94,974명, 해군 7,715명, 해병대 1,166명, 공군 1,897명으로 북한군 10개 사단으로 구성된 198,380명에 비하면 2분의 1수준이었으며, 전투력은 북한군이 2.6배 우위에 있었다(국방군사연구소, 1995c).

 6·25전쟁이 발발하자 이승만 대통령은 한국군의 독자적인 작전에 의한 전쟁 수행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같은 해 7월 14일 한국군의 작전지휘권을 유엔군사령관인 맥아더사령관에게 이양하였다. 이후 한국군이 유엔군사령관의 지휘에 따라 육군 위주의 작전을 수행하면서 자연스럽게 육군은 한국군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었다(김학준, 2003).

 1961년 5·16 군사혁명을 통해 정권을 장악한 박정희 정부는 6·25전쟁으로 황폐화된 국가재건을 위한 경제개발계획을 적극 추진하면서 동시에 한미 간의 이원화된 군사조직을 개편함으로써 군사에 관한 국방부장관의 권한을 강화하고 이를 체계화하였다. 1963년 6월에는 합동참모회의와 합동참모본부를 설치하여 이 기구를 통하여 전략지침, 전략계획 및 용병작전에 관한 사항과 국방부장관이 정하는 군사에 관한 주요사항 및 기타 법령이 정하는 사항 등을 심의하게 하였다(국방군사연구소, 1995a). 그렇지만 한국은 한미동맹 체제를 기반으로 1978년 한미연합군사령부를 창설함으로써 해·공군을 미군의 전력에 의존한 채 육군위주의 지휘구조와 전력구조로 발전하는 군사사적 전통을 쌓게 되었다.

 박정희 정부 이후 이어진 육군 출신의 전두환·노태우 정부 등 군사정권은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한국적 여건에 부합된 국방조직을 구축하기 위하여 군구조 개편을 추진하였다. 당시 국군은 육군이 절대 다수를 차지한 구조로서 육군문화의 특성을 잘 살려 지난 반세기 이상 공산주의자들의 불법 침략으로부터 국가를 수호하였다. 뿐만 아니라 국토개발에서부터 대민지원, 그리고 기술 및 전문인력 양성, 문맹퇴치, 국가관 및 시민의식 교육 등을 통해 국가를 근대화하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육군본부, 1999).

 그 결과 한국군의 문화도 육군문화가 주도하면서 창군 이후 여러 차례 시도된 군 개편과정에서 각 군의 문화적 차이에 따른 갈등과 불화가 드러나기도 하였다. 각 군은 국군조직법(제3조)에 의해 상이한 임무를 부여받았기 때문에 활동영역도 서로 다르다. 각 군의 이러한 상이성은 작전 특성, 가치관과 정서, 리더십 등에서도 차이를 낳게 하고, 각 기 독특한 문화를 형성하는 요인이 된다. 군대문화는 무형적인 성격이 강하여 문서화 되어 있지는 않지만 부대원들의 사고와 행동의 일관성을 유지하고 조직을 하나의 유기체로 묶는 역할을 한다. 군대문화와 관련된 사안은 향후 통일한국의 군사통합 과정에서도 중요한 문제가 될 수 있다. 한국군은 군별로 문화적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합동성을 바탕으로 상호 협조된 작전을 수행해야 한다. 그런데 이와 같은 상이한 문화로 인해 군 간에 이질감이 형성되거나 갈등이 유발된다면 국가안보에 큰 위험이 초래될 수 있다(박균열, 2006).


Ⅳ. 영국군의 역사가 한국군에게 주는 시사점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영국과 한국의 사례를 비교해볼 때 영국군의 사례는 한국군에게 몇 가지 시사점을 준다. 이를 정리하여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한국은 영국과 마찬가지로 바다를 통하여 국가의 생존과 번영을 이루어야 한다는 점을 시사한다. 휴전선으로 분단된 채 한반도의 남쪽에 위치한 한국은 지정학적으로 섬나라인 영국과 유사한 상황에 처하여 있다. 섬나라인 영국은 대륙과 연계하여 국가부흥을 달성하기에는 지정학적으로 불리하였다. 물론 섬나라였기 때문에 국가안보 측면에서는 해양이라는 자연적인 방어선을 가질 수 있는 유리함도 지녔다. 하지만 영국은 지정학적인 장애요인을 극복하기 위하여 해양을 중시한 국가전략과 군사사상을 채택하고 이를 발전시켜 왔다. 해양력을 활용하여 제해권을 장악하고 이를 기반으로 자국 주도의 해상무역체제를 구축하는 데 중점을 둔 것이다. 결과적으로 영국은 이를 기반으로 전 세계에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대영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다.

 둘째, 해양력의 유용성에 대한 국가지도자들의 올바른 이해가 필요하다는 점을 시사한다. 영국의 왕실은 해군력을 포함한 해양력에 대한 중요성을 잘 인식하고 있었다. 섬나라였던 영국은 해군이 지상군에 비해 자국의 국가이익을 수호하는 데 유용성이 더 높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었다. 전쟁 중이 아니면 지상군은 사실 상 쓰임새가 적었지만 해군은 그렇지 않았다. 해군이 보유한 선박들은 전시에는 군함으로, 평시에는 상선으로 운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해군의 유용성으로 인해 해군력 증강은 의회에서 해군이 절대왕권의 권력행사 도구로 전락할 우려 없이 더욱 탄력적으로 추진될 수 있었다.

 셋째, 제해권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국가적인 차원에서 오랜 기간 동안 해양력을 육성시켜야 한다는 점을 시사한다. 영국의 헨리 8세(Henry Ⅷ)는 해양력을 확보하기 위하여 경제적인 어려움이 있었지만 재위 기간 내내 왕실의 해군(Navy Royal) 건설에 매진하였다. 그 결과 영국해군은 1588년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격파하고 제해권을 장악할 수 있었다. 이후에도 찰스 2세(Charles Ⅱ)는 해군력을 강화하여 제해권 장악을 통해 신대륙 확장이나 식민 지배권을 확보하는 데 주력하였다. 당시 해군력을 건설하는 데에는 막대한 왕실 예산이 소요되어 재정 상태가 빈약해지기도 하였으나 결과적으로는 해양을 통해 국부를 달성할 수 있었다.

 넷째, 역사와 전통을 존중함으로써 각 군 간의 갈등을 줄여 나갈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영국은 각 군의 존재 가치를 인정하면서 군의 전통과 문화를 존중하고 있다. 영국군은 육군이 해군보다 병력규모는 크지만 각 군을 열거할 때 해군을 제일 앞에 둔다. 또한 국방부 내의 장성직위 및 합동군부대의 지휘관은 각 군에서 윤번제로 보직하는 등 3군의 견제와 균형 발전을 보장하고 있다. 한국정부와 군 지휘부는 영국의 사례를 참고하여 각 군의 전통과 문화적 차이를 인식하고 그 전통을 존중하면서 군을 발전시켜 나가야 할 것이다. 군의 역사적 전통을 중시하는 것은 매우 의미 있고 중요한 사안으로서 이런 점에서 영국해군의 역사는 한국군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Ⅴ. 결 론


 한국은 지정학적으로 영국과 달리 섬나라는 아니지만 남북이 휴전선으로 분단된 현재의 안보상황을 고려한다면 섬나라와 다름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바다는 국가안보에 있어 대단히 중요한 영역이며 바다를 지켜야 할 해군의 임무도 그만큼 중요할 수밖에 없다(임성채·강병춘, 2016). 과거 6·25전쟁 시 유엔군은 인천 앞바다를 통해 상륙작전을 성공시킴으로써 북한군을 궁지에 몰아넣고 전장상황을 한 순간에 역전시킨 바 있다. 또한 임진왜란 시에는 충무공 이순신 제독이 이끄는 조선함대가 바다에서 왜군을 차단함으로써 외침으로부터 국가를 지켜낼 수 있었다. 바다는 안보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경제적인 측면 등에서도 중요하다. 영국은 제해권을 장악하고 바다를 통해 세계를 경영하면서 국부를 창출함과 아울러 대영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다. 영국과 유사한 안보상황에 처해 있는 한국은 영국의 해양중시 국가전략과 군사사상을 교훈삼아 바다를 통해 세계로 뻗어 나가야 한다.

현재 한국의 위상은 건국 초기와는 상당히 다르다. 한국군의 수준 또한 해·공군을 포함하여 창군 초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향상되었다. 인제 한국군은 질과 양적인 측면에서 세계적인 수준으로 성장하였으며 세계의 안녕과 평화를 위해 활동하고 있다. 그러므로 한국군도 그 위상에 맞추어 새로운 역사와 전통을 쌓아 나가야 한다. 이를 위해 한국정부와 한국군은, ① 영국과 마찬가지로 바다를 통하여 국가의 생존과 번영을 이루어야 한다는 점을 인식해야 하며, ② 해양력의 유용성에 대한 국가지도자들의 올바른 이해가 필요하고, ③ 제해권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국가적인 차원에서 오랜 기간 동안 해양력을 육성시켜야 하며, ④ 역사와 전통을 존중함으로써 각 군 간의 갈등을 줄여 나가야 할 것이다.



참 고 문 헌



국방군사연구소. 『건군 50년사』. 서울: 인쇄공업협동조합, 1995a.

국방군사연구소. 『한국전쟁(상)』. 서울: 국방군사연구소, 1995b.

국방군사연구소. 『1945~1994 국방정책 변천사』. 서울: 군인공제회 제1인쇄사업소, 1995c.

국군조직법(법률 제9호).

김학준. 『한국전쟁』. 서울: 박영사, 2003.

박균열. 『통일 한국군의 문화통합과 가치교육』. 파주: 한국학술정보, 2006.

영국 국방부. Annual Report and Accounts 2003~2017.

영국 국방부. History of the Ministry of Defence. https://www.royalnavy.mod.uk(검색일: 2020.10.19.).

영국 국방부. Royal Navy History. https://www.royalnavy.mod.uk(검색일: 2020.10.19.).

육군본부. 『육군문화』. 대전: 육군인쇄창, 1999.

임성채·강병춘. 『대한민국해군 창군사』. 계룡: 국군인쇄창, 2016.

정부조직법(시행 1948.7.17., 제1호, 제정 1948.7.17.).

Gat, Azar. War in Human Civilzation. 오은숙·이재만 역. 『문명과 전쟁』. 파주: 문학동네, 2017.

The Constitution of the United Kingdom, 제121조. https://www.ippr.org/(검색일: 2020.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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