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9호(6-7월) | 부동항 블라디보스토크의 부활과 고려인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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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이원희(미래군사학회 이사, 군사학 박사) 작성일19-06-27 15:49 조회2,380회 댓글0건본문
부동항 블라디보스토크의 부활과 고려인의 삶
이원희(미래군사학회 이사, 군사학 박사)
Ⅰ. 들어가며
2019년은 3‧1운동 및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임시정부는 1919년부터 1945년까지 27년간 중국에서 상해시기, 이동시기, 중경시기를 거치며 활동하였고 해방과 함께 환국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우리 민족은 중국뿐만 아니라 만주, 연해주 등지에서도 온갖 고난을 극복하면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러시아의 동남부, 시베리아의 끝자락에 위치하고 있는 연해주(프리모르스키, 바다와 연해있다는 의미)는 한반도의 2/3 면적에 인구는 약 200만 명으로 우리 한민족의 역사와 애환이 서려있는 곳이다. 한때 발해의 강역(疆域)이기도 하였던 연해주는 일제 치하에서 한민족의 국권수복을 위한 수많은 의사, 열사들이 활동했던 무대이기도 하다. 아편전쟁 이후 영국에 할양되었던 홍콩 등은 1997년 반환되었으나 연해주는 아직도 변함없이 러시아 영토로 남아있다. 흔히 우리가 한반도 주변 4강이라고 할 때 러시아를 포함하는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이 연해주가 한반도와 접해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본고에서는 2017년 필자의 현지답사를 바탕으로 하여, 러시아가 연해주의 주도(州都)이자 부동항인 블라디보스토크를 차지하게 된 역사적 배경과 최근 블라디보스토크의 부상(浮上), 그리고 연해주 지역에서 활동하였던 독립운동가들의 활약상과 이 지역에서 살아온 고려인들의 삶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Ⅱ. 연해주의 역사
1. 한인 이주 역사
연해주는 고조선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한민족의 역사와 삶을 함께 했던 지역이다. 조선후기인 1863년 함경도 농민 13가구가 연해주로 이주하면서 고려인의 이주 역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으며, 1874년에 블라디보스토크 해안가인 개척리에 최초의 한인촌이 건설됐다. 1905년 을사늑약 체결 전후부터 수많은 애국지사들이 연해주로 망명하여 항일운동의 중심지로 떠올랐고, 고려인이 집단으로 거주하는 촌락도 생겨났다. 1911년 콜레라가 창궐한다는 구실로 러시아는 서북쪽의 신한촌으로 한인들을 강제 이주시키고 그 자리에는 러시아 기병단이 자리하게 된다. 신한촌은 당시 규모가 가장 큰 고려인 거주지였으며, 1910년대 항일운동의 구심점이 되었다. 연해주 지역으로의 이주 한인은 해마다 증가해 1882년에 1만여 명, 1908년에는 5만여 명, 1926년에는 20만여 명으로 보고될 정도다.
1937년 스탈린은 일본군 첩자를 막는다는 구실로 극동지방의 고려인들을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시켰다. 우수리스크(라즈돌리노예역)는 1937년 17만 명이 넘는 고려인들이 시베리아 횡단열차에 실려 중앙아시아(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키르기스스탄 등) 불모의 땅으로 강제이주를 당한 역사적 현장이기도 하다. 화물열차에 실려 약 50일 동안 이동하면서 2만 명 이상의 동포가 아사(餓死), 병사(病死) 또는 동사(凍死)했다.
중앙아시아에 도착해서는 거주할 곳이 없어 토굴을 파고 거적때기로 찬바람을 피해야 하는 고난의 환경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고려인은 중앙아시아에 벼농사를 도입하고 집단농장에서 뛰어난 성과를 보이며 모범적인 민족으로 인정되었다. 1953년 스탈린 사후, 이주의 자유를 찾으면서 고려인은 사회 각계각층으로 진출하였고, 1991년 소련의 붕괴 이후 많은 고려인들이 중앙아시아에서 연해주로 재이주하게 되었다. 중앙아시아 고려인들의 역사적인 재이주는 1937년 이후 단절된 연해주의 한민족 역사를 새로 쓰게 하는 힘이 되었다.
2. 연해주 독립운동의 발자취
지금은 러시아의 영토이지만 두만강 북쪽 연해주지역은 과거 발해제국 영토의 일부로서 우리 한민족의 역사와 삶이 함께 했던 곳이다. 연해주는 한말부터 대외 독립운동의 구심점이자 희망의 둥지가 되었다. 조선말 의병의 항일전쟁은‘헤이그 특사 사건’을 구실로 행해진 1907년 8월의 군대해산을 계기로 크게 확대되었는데 이는 연해주의 한인 사회에까지 그 영향을 미쳤다. 지금도 연해주의 블라디보스토크, 우수리스크, 크라스키노 등지에는 많은 항일독립운동 유적지들이 남아 있다. 그 중에서도 블라디보스토크 북쪽 약 100Km 지점에 위치한 우수리스크는 연해주 항일운동의 중심지로서 애국지사 최재형 선생의 옛집, 헤이그에 특사로 파견되었던 이상설의 유허비, 전로한족중앙총회 결성지와 4월 참변 추모비, 1937년 고려인들의 강제이주 당시 동포들을 태운 첫 기차가 떠난 라즈돌리노예역 등 많은 독립운동 사적지들이 남아 있다.
일제 강점기 의병들의 거점이었던 크라스키노를 조선인들은 연추라고 불렀다. 1909년 3월 안중근(1879~1910)은 동지들과 함께 동의단지회(同意斷指會)를 결성, 12명이 손가락을 자르고 혈서로 ‘대한독립’을 맹세한 곳이 바로 크라스키노지역이다. 이곳에는 단지동맹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연해주 항일운동의 대부’라고 불리는 최재형(1858~1920)은 조선 노비의 아들로 태어나 러시아로 이주해 러시아의 거부가 되었다. 그는 1905년 일제에 의한 을사늑약과 1907년 군대 해산에 충격을 받고 깨달은 바 있어 본격적인 항일투쟁가로서의 길을 걷게 된다. 전로한족중앙총회 명예회장으로 대동공보 창간, 권업회 운영, 안중근의 거사 비용 및 사격훈련 지원 등 조선의 항일독립운동을 지원했다. 그는 1920년 4월 참변 당시 일본 헌병대에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이상설(1870~1917)은 충북 진천 출생으로 중국 용정에서 서전서숙(瑞甸書塾)을 설립하였다. 1907년 고종의 밀명으로 이준‧이위종과 함께 헤이그 특사로 파견되어 국권회복을 위해 외교활동을 펼쳤다. 그 후 연해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1917년에 생을 마감하였다.“동지들은 합세하여 조국 광복을 기필코 이룩하라. 나는 조국 광복을 이루지 못하고 이 세상을 떠나니 어찌 고혼인들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으랴. 내 몸과 유품은 모두 불태우고 그 재도 바다에 날린 뒤 제사도 지내지 마라”는 유언에 따라 수이푼 강가에서 화장하고 유품들도 모두 불태워 강물에 뿌려졌다. 강 언덕에는 그의 유허비(遺墟碑)가 건립되어 있다.
Ⅲ. 블라디보스토크의 부활
1. 연해주와 러시아의 동진정책
러시아 제국은 원래 유럽에 속해 있던 나라였으나 명나라 말기부터 청나라 초기에 중국 내란을 틈타 차츰 남하하여 아시아 동부지역 헤이룽강(흑룡강=아무르강) 상류일대까지 진출해 네르친스크(Nerchinsk)와 알바진(Albazin) 등지에 진지를 구축하였다. 이를 둘러싸고 1685년 러시아와 청나라 간에 전투가 시작되었으며, 강화교섭을 통해 양국은 1689년 네르친스크 조약을 맺고 헤이룽장성 동북지역 영토에 대한 러시아의 영유권을 인정하였다.
그 이후 청나라와 영국‧프랑스 간의 제2차 아편전쟁(1856-1860)을 계기로 러시아가 동북지방에서 남하하면서 1858년 아이훈에서 청국을 겁박해 네르친스크 조약을 뒤집고, 한반도 면적의 3배에 달하는 60만 ㎢의 영토를 추가로 할양받게 된다. 태평양으로 진출할 수 있는 부동항(겨울에도 얼지 않는 항구) 확보의 발판을 마련한 것이다(아이훈 조약). 1860년 러시아는 아편전쟁 종전을 중재한다는 구실로 청과 베이징 조약을 체결해 아이훈 조약의 내용을 재확인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동안 청‧러 양국이 공유하였던 우수리강 동쪽인 연해주 일대를 러시아 영토로 정하게 되었고 국경에서 양국간의 자유교역을 인정하고 세금을 면제하기에 이른다. 불평등조약이었다. 이를 종합해 볼 때, 난징조약(1842)으로 영국에 홍콩 섬을 내준 청나라는 베이징 조약 체결로 홍콩 섬 맞은 편 주룽(현재의 홍콩 중심부)을 내주었고, 아이훈 조약(1858)으로 러시아에 헤이룽강 이북지역을 넘겨준 데 이어 연해주까지 넘겨주게 되었다.
러시아는 세력 확장을 위해 부동항을 확보해야 했다. 그래서 동쪽 시베리아 방면과 서쪽 발트해 방면, 남쪽 흑해 방면으로 진출하려고 했다. 러시아의 연해주 점령은 ‘동진정책’에서 시작하였다. 16~17세기 서구 유럽국가들이‘해상무역’이라는 구실 하에 동남아시아에 대한 식민지화 정책을 추진할 때 제정러시아는 우랄산맥 동쪽의 시베리아 지역에서 동진정책을 제창하면서 여러 국가를 강점하기 시작하였다. 러시아 동진정책의 주요 대상은 중국이었다. 러시아는 주로 모직물과 모피 등을, 중국은 주로 차와 견직물 등을 수출하였다. 네르친스크 조약 이후에 러시아는 동진을 계속하여 캄차카반도와 베링해협, 알래스카 등지의 탐험에 착수하였다. 이러한 탐험결과에 기초해 러시아는 1799년 ‘러시아-아메리카 회사’를 설립해 북태평양 지역에 대한 개발권을 행사하였다.
러시아가 연해주를 점령하게 된 1등 공신은 니콜라이 무라비요프 아무르스키(1809~1881)이다. 그는 1847년 황제 니콜라이 1세의 신임을 얻어 동시베리아 총독(재임 1847-1861)으로 기용되어 극동정책을 수행하였다. 황제의 의향이 네르친스크 조약으로 중국 영토가 된 헤이룽강 지방의 탈환임을 알고, 1850년 헤이룽강 하구에 니콜라옙스크를 건설하였다. 크림전쟁 때에는 영국‧프랑스군에게 공격당한 캄차카 구원을 구실로 헤이룽강 유역을 점령하고, 1858년 청나라와 아이훈조약을 강제로 맺어 헤이룽강 이북을 러시아령으로 만들었다. 그 공적으로 아무르스키 백작 작위를 받았으며 시베리아의 개척자로서 표트르대제에 버금가는 명성을 갖고 있다.
2. 부동항 블라디보스토크의 부활
연해주의 주도인 블라디보스토크(Vladivostok)는 인천국제공항에서 비행기로 약 2시간이면 도착할 수 있다. 러시아 태평양함대사령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태평양전쟁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설립된 잠수함박물관, 태평양전쟁 때 일본군의 공격에 대비해 만든 러시아군 요새의 흔적이 남아있는 루스키섬, 시베리아 횡단열차의 시발점이자 종착역, 그리고 율브린너의 생가, 개선문, 아르바트 거리 등이 있어 많은 관광객들이 찾고 있다.
러시아어로‘동방을 지배하라’는 뜻을 지니고 있는 블라디보스토크는 러시아 동해 연안의 최대 항구이자 군항이다. 소련 극동함대의 사령부가 있는 해군기지이자 북극해와 태평양을 잇는 북빙양(북극해) 항로의 종점이며, 모스크바에서 출발하는 시베리아 철도의 종점이기도 하다.
1860년 7월 2일 블라디보스토크는 러시아 해군항으로 지정되면서 도시 건설이 시작됐다. 블라디보스토크는 1870년에 시로 승격되었으며, 1890년대~1900년대에는 러시아 극동 지구의 대외교역, 외교 및 상업의 중심지로 부상했다. 1890년대부터는 무역항으로서 크게 발전하였으며, 1903년 시베리아 철도가 완전히 개통됨으로써 시베리아를 횡단하여 모스크바와도 이어지게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1917년 공산혁명과 이후 적군과 백군 간의 내전 등을 겪으면서, 블라디보스토크는 군사요새로서의 중요성이 커졌다. 1992년 1월까지 외국인은 물론 내국인(출입허가증이 필요)에게도 출입이 통제되었던 도시이다. 외국인에게 개방되기 시작한 후 블라디보스토크는 국제도시, 자유항구로 급격히 부상하여 세계 각국의 선박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나진과 원산에서 출항한 만경봉호도 이곳을 수시로 드나들고, 한국인, 북한인, 고려인, 조선족 등 1민족 4국민이 어울려 살아가는 미래형 도시가 되었다.
시베리아횡단철도(TSR)는 무려 25년간(1891~1916) 약 10억 루블을 들여 건설하였다. 세계에서 가장 긴 이 철도의 길이는 9,288km로 지구 둘레의 3분의 1에 해당되고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모스크바까지 가는 데에만 꼬박 6박 7일(156시간)이 걸린다. ‘신(新)실크로드’이자 러시아판 ‘일대일로’라고 할 수 있다. 장차 블라디보스토크는 대륙을 동서로 잇는 철도는 물론이요, 남북의 바다를 잇는 사통팔달(四通八達)의 허브가 될 수도 있다.
Ⅳ. 연해주의 고려인
1. 고려인, 그들은 누구인가?
한국은 중국, 이스라엘, 이탈리아에 이어 세계에서 4번째로 교포를 많이 가진 나라이다. 이는 고난의 한국 역사와도 많은 연관이 있다. 일본이 강점하기 시작하였던 무렵부터 생긴 교포란 말은‘다른 나라에 살고 있는 우리나라 동포’를 일컫는 말이다. 재외동포, 해외동포, 해외교포 모두 같은 말이다. 우리는 일제 때 만주로 간 사람들을 조선족이라 하고, 연해주로 간 사람들을 고려인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오늘날 젊은이들은 재미동포나 재일교포, 조선족이란 말에는 익숙해 있지만 고려인이란 말은 잘 모르거나 상대적으로 생소하게 느낀다. 오랜 세월이 흐르다보니 이들에 대해 그만큼 모른다는 말이 맞을 것이다.
러시아인들이 ‘카레이스키’라고 부르는 고려인은 구소련 붕괴 이후 독립국가연합 전체에 거주하는 한민족을 이르는 말이다. 이들 국가에는 러시아,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타지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키르기스스탄, 우크라이나, 몰도바 등이 포함된다. 한국 역사 속에 나오는‘고려’라는 나라와 직접적인 관련은 없다. 원래 고려인은 조선인으로 부르다가 1988년에 개최된 서울올림픽을 전후하여 자신들을 고려인이라고 공식적으로 부르기 시작하였다. 그들에 의하면, 자신들은 조선인이나 한국인이 아닌 소련사람이고, 자신들의 언어와 문화도 한 세기를 훌쩍 지나는 동안 이미 소련의 특성을 많이 띠고 있으며, 남한이나 북한과는 다른 자신들만의 특수성을 띠고 있으니 그 어느 쪽도 아닌 ‘고려인'이라고 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이다.
결국 고려인이라는 호칭은 나라 잃은 약소국의 슬픔과 한반도의 분열이 낳은 특수한 역사의 산물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현재 중앙아시아에 분포된 고려인들은 우즈베키스탄에 19만 명, 카자흐스탄에 10만 명, 모스크바ㆍ연해주ㆍ사할린에 각각 4만 명 등 총 55만 명에 이른다.
2. 고려인과의 소통의 장(場) 『고려인 문화센터』
우수리스크에는 고려인들의 애환과 삶을 기억하기 위한 『고려인 문화센터』가 설립되어 있다. 1937년 고려인 강제이주는 1923년 일본의 관동대지진 사건, 1992년 5월의 LA 한인촌 사건과 함께 해외교포의 3대 비극 중의 하나로 불리어진다. 험난한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150여 년간 오롯이 자신들만의 삶을 일구어온 고려인의 역사와 자취를 『고려인 문화센터』에서 만나볼 수 있다.
우수리스크에 설립된 『고려인 문화센터』는 한인동포들의 염원을 담아 2004년 러시아 한인이주 140주년을 기념하여 한국 정부의 지원을 받아 2009년에 건립되었다. 이곳에는 발해시대와 한인들의 연해주 이주 역사를 살펴 볼 수 있는 역사관을 비롯하여 다목적 공연장, 한국어와 컴퓨터를 배울 수 있는 교육장 등이 설치되어 있다. 특히 고려인 역사관은 1860년대부터 연해주 지역으로 이주한 고려인들이 척박한 땅에서 일군 고단한 삶과 문화를 소개하는 소중한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는 1800년대 이전 생활문화(돌, 전통혼례, 집단농장 생활)와 함께 연해주 정착이후 고려인의 삶을 소개하고 있으며, 최재형, 안중근, 이범진 등의 독립운동가 활동과 13도의군, 동의단지회, 고려혁명의용군, 한인신문의 민족계몽활동, 4월 참변, 연해주 만세운동 등 항일투쟁의 역사자료를 관련 사진과 함께 전시하고 있다. 또한 우리 한민족을 대표하는 민요인 ‘아리랑’을 소개하고 있는데 이 아리랑은 한인들의 강제이주에 따라 한반도에서 러시아를 거쳐 중앙아시아, 유라시아까지 퍼져나갔다. 머나먼 이국땅에서 고려인들은 명절 때나 고향 생각이 날 때 그리고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아리랑을 부르며 이를 극복해 나갔다. 2012년 12월 유네스코 세계 인류무형유산으로 등재된 아리랑은 모름지기 시대와 공간을 초월하여 한민족을 대표하는 문화의 상징이자 노래 이상의 의미와 가치를 지닌 가슴시린 삶인 동시에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는 역사적 여정(旅程)이기도 하다.
『고려인 문화센터』
3. 고려인에 대한 현실과 과제
러시아 연해주에 살던 고려인들이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당한 지 80여 년이 지났다. 그런데 이들 고려인들 중 약 10%가 국적이 없다고 하니 무국적 고려인이 무려 5만 명이나 되는 셈이다. 국적도 없이 경제적 약자로 살며 기본적인 교육이나 의료혜택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인간다운 삶을 누리지 못하고 살았다는 것은 불을 보듯이 뻔한 일이다. 그런데 한 세기 가까이 유라시아에서 떠돌던 고려인 동포들이 최근 들어 모국인 한국에 와서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고 있다. 1990년대부터 국내로 들어오기 시작한 고려인들은 최근 급격히 늘어나 4만 5천명에 이른다. 대표적인 곳이 바로 광주광역시 광산구의 ‘고려인마을’(약 3000명 거주)과 국내 최대 고려인 거주지인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의 ‘땟골마을’(약 7000명 거주)이다.
국내로 들어 온 고려인들이 가장 바라는 것은 바로 거주와 노동의 자유라고 한다. 그런데 정작 이들을 위해 제정된 재외동포에 관한 법이 참으로 묘하다. 현행 ‘고려인동포 합법적 체류자격 취득 및 정착 지원을 위한 특별법’(고려인특별법)은 ‘1860년 무렵부터 1945년 8월 15일까지의 시기에 농업이민, 항일독립운동, 강제동원 등으로 러시아 및 구소련 지역으로 이주한 자와 그 친족으로 현재 해당 지역에 거주하고 있는 자’를 지원 대상으로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국내로 이주한 고려인은 지원 대상에서 제외된다. 또한‘재외동포의 출입국과 법적지위에 관한 법률’(재외동포법)에 따르면‘부모의 일방 또는 조부모의 일방이 대한민국의 국적을 보유하였던 자로서 외국 국적을 취득한 자’를 재외동포로 명시하고 있어 동포 4세는 외국인으로 분류된다. 고려인 3세까지만 재외동포로 인정되고 4세는 성인이 되면 한국을 떠나야 하는 것이다. 한 집에 살아도 부모는 동포이고 자녀는 외국인이 되는 기이한 현상이 벌어지기도 한다. 만약 이들이 한국에 정착하기 위해서 왔다면 이들은 갈 곳도 없게 되는 것이다.
Ⅴ. 나오며
연해주 지역은 역사적으로 독립운동의 중심지 역할을 한 곳이다. 그곳의 블라디보스토크는 러시아가 세력 확장을 위해 펼친 ‘동진정책’의 산물로 이제는 군항으로서의 역할은 물론 경제활력의 허브로서 힘찬 기지개를 펴고 있다. ‘바다를 지배하는 자, 세계를 지배한다’고 했다. 최근 블라디보스토크의 부활은 4차산업혁명 시대에 부응하여 미래 해양 군사력과 국방산업 건설을 위해 추진하는 ‘스마트 해군(SMART NAVY)’정책이 성공해야 하는 이유를 잘 보여준다.
다문화시대에 접어들면서 재외동포에 대한 관심이 필요하다. 그 중에서 고려인들은 대부분 일제강점기 러시아 연해주에서 직‧간접적으로 항일독립운동을 펼친 분들의 후손이다.‘조국을 잊지 말라’는 부모님의 뜻에 따라 아직도 한국 성(姓)을 쓰는 이들도 많다. 그런데 정작 조국은 이들을 외국인, 이방인 취급해서야 되겠는가? 고려인 후손들이 한민족 고유 언어와 전통문화를 점차 잃어가고 법적 보호도 받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과연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3‧1운동과 임시정부수립 100주년을 맞은 올해, 고난의 시기에 한국의 독립을 위해 온갖 고난을 감내했던 선열들의 뜻을 기리고 미래 통일 한국의 참된 모습을 생각한다면 정부, 기업, NGO가 교류ㆍ협력사업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우리 국민들도 고려인을 바로 알고 기억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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