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공 이순신 제독의 호칭 > E-저널 2016년 ISSN 2465-809X(Online)

 

▶E-저널 2016년 ISSN 2465-809X(Online) 목록

E-저널 2016년 ISSN 2465-809X(Online)

제14호(08월) | 충무공 이순신 제독의 호칭

페이지 정보

Written by 김무일 작성일16-09-21 09:15 조회2,254회 댓글0건

본문

충무공 이순신 제독의 호칭


  김무일(예 해군대령)


“세종대왕함의 보유는 약 500년 전 충무공 이순신 제독이 세계 최초의 철갑선 거북선을 건조해 세계 해전사에 큰 획을 그은 것과 비견될 수 있을 것이다”. (국방일보 08. 10. 7 화 「해군의 꿈을 펼치다」)

  “옥포대첩 기념공원을 방문했을 때 20여회의 해전에서 승리함으로써 불패의 신화로 나라를 지켜낸 충무공 이순신 제독의 정신을 되새겼다” (국방일보 09. 7. 7 화 「노병과 사적지가 주는 교훈」)

  필자는 위의 기사에서 보는 것처럼 ‘충무공 이순신 제독’이란 호칭을 대할 때 마다 조선시대 주어진 이름 충무공과 현대적 용어인 제독이 합해져 마치 ‘갓 쓰고 양복 입은 어정쩡한 모습’이 연상된다. 이렇게 이중 삼중 높임말로 호칭한다고 더욱 위대해지는 것은 아닐텐데 라고 생각해 본다.
  忠武公은 고려와 조선시대 큰 전공을 세운 武人이 죽은 뒤에 나라에서 내리는 이름, 즉 諡號(시호)로서 “일신의 위험을 무릅쓰고 임금을 받들어(忠) 쳐들어오는 적의 창 끝을 꺾어 외침을 막았다(武)” 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 충무공 시호 받은 공신 11명
  고려시대 충무공 시호를 받은 공신은 최필달, 고문주 등 2명이고 조선시대는 조영무, 남이, 이준, 김시민, 이순신, 정충신, 구인후, 이수일, 김응하 등 9명이다. 조선시대 충무공들 중 역사책이나 드라마를 통해 우리들 귀에 익은 몇몇 공신들의 간략한 공적을 살펴보면
  - 조영무 : 조선의 개국공신이자 태종 (조선 제 3대 왕)이 왕위에 오를 때 공을 세워 좌명공신에 오르고 병조판서에 이어 우의정을 지냈다.
 - 남  이 : 태종의 넷째 딸 정선공주의 아들로서 무과를 통해 등용된 인물이며 세조시대 최대의 위기를 몰고 온 이시애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적개공신 1등에 책록되었다. 또한 건주야인을 토벌한 전공으로 공조판서가 되었으며 27세의 나이로 병조판서까지 올랐다.
 - 김시민 : 임진년 10월에 벌어진 제1차 진주성 전투시 진주목사로서 수비명력 3천8백 명을 지휘하여 왜군 2만 여명의 공격을 격퇴시켰으나 이때 입은 부상으로 순절하였다. 사후에 영의정으로 추증되었고 임란선무공신 2등에 책록되었다.
 - 구인후 : 광해군(제15대왕)15년에 제19대 통제사, 인조(제 16대 왕)때 제25대 통제사로, 3도수군통제사 직을 두 번이나 역임했다. 병조, 공조판서를 지내고 효종(제 17대 왕)때 충청병사에 이어 우의정이 되었다.
 - 이수일 : 경상좌수사, 제20대 통제사, 경상우도 병사와 함경도 북병사를 지냈으며 인조 2년 이괄의 난 때에는 평안도 병사로서 큰 공을 세워 진무 2

등공신에 책록되었다. 뒤에 평조판서를 역임하였고 사후 좌의정에 추증되었다.

 

▖조선관료의 등급
  조선시대 관료의 등급을 品(품)이라 하여 정⋅종 각 9품으로 나누어 총18품 30계급으로 구성되어 있다. 동반 4품 이상은 ‘大夫’ 5품 이하는 ‘郞’을, 서반 2품 이상은 ‘大夫’, 3, 4품은 ‘將軍’, 5, 6품은 ‘校尉’, 7품 이하는 ‘副尉’라는 명칭을 덧 붙여 해당 계급을 표기하였다.
  이처럼 무관으로서 승진할 수 있는 최고 계급은 정3품 절충장군으로서 ‘반상’의 차별이 심하였다. 물론 이순신처럼 대부로 승진한 경우도 있으나 무관이 대부로 승진하는 것은 조선조 500년 동안 그렇게 많지 않았다.

 

<品階表>

구분

계급

동반

서반

구분

계급

동반

서반

 

 

 

正一品

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

 

 

 

 

正五品

通德郞

通善郞

果毅校尉

忠毅校尉

從五品

奉直郞

奉訓郞)

顯信校尉

彰信校尉

從一品

崇祿大夫

崇政大夫

正六品

承議郞

承訓郞

敦勇校尉

進勇校尉

正二品

正憲大夫

資憲大夫

從六品

宣敎郞

宣務郞

勵節校尉

秉節校尉

從二品

嘉靖大夫

嘉善大夫

正七品

務功郞

迪順副尉

正三品

通政大夫

折衝將軍

 

 

從七品

啓功郞

奮順副尉

 

 

 

 

正三品

通訓大夫

禦侮將軍

正八品

通仕郞

承義副尉

從三品

中直大夫

中訓大夫

建功將軍

保功將軍

從八品

承仕郞

修義副尉

正四品

奉正大夫

奉列大夫

振威將軍

昭威將軍

正九品

從仕郞

效力副尉

從四品

朝散大夫

朝奉大夫

定略將軍

宣略將軍

從九品

將仕郞

展力副尉

 

특히 정3품을 상⋅하로 구분하여 통정대부/절충장군 이상을 ‘당상’, 통훈대부/어모장군 이하를 ‘당하’라 하여 예우상 차별을 두었다.
 관직의 정식 명칭은 階(계), 司(사), 職(직) 순서로 표기하였으며, 예를 들어 영의정은 ‘대광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 이라고 호칭하는 것이 조선시대의 법도였다. 또 관직에는 소정의 품계가 있으나 예외의 경우도 많아서 자신의 품계보다 낮은 직위에 보직될 때는 직명 앞에 行(행)자를, 반대로 품계보다 높은 직위에 보직될 때는 守(수)자를 붙였으며 이를 行守法(행수법)이라 하였다.

 

○ 正憲大夫(정헌대부) 이순신
 정읍현감(종6품) 이순신은 1591년 2월 13일 절충장군(정3품)으로 특진하여 전라좌도 수군절도사에 보직된다. 다음해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그해 5월 7일 옥포해전 승전으로 종2품 가선대부로, 6월 5일 당항포해전 승전으로 정2품 자헌대부로, 7월 8일 한산도해전 승전으로 정2품 상계인 정헌대부로 승진한다. 이처럼 임진년 한 해 동안에 네 단계나 상위 계급으로 승진하여 그가 노량해전에서 전사할 때까지 6년 동안 정헌대부로 머문다. 임진년 다음해인 계사년 8월에는 종2품 삼도수군통제사를 겸한다. 따라서 1598년 그가 전사할 때 까지의 호칭은 ‘정헌대부행 전라좌도 수군절도사 겸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이라고 부르는 것이 그 당시의 법도였다.


 그러나 스물다섯 글자로 된 호칭은 너무 길어서 실제로 사용하기에는 불편하기 때문에 그가 보직하고 있던 직책이나 계급을 약칭하여 ‘통제사 이순신’, ‘이 통제사’ 또는 ‘이순신 장군’, ‘이 장군’ 이라고 불렀다.
 이중 이순신 장군 이라는 약칭은 이순신이 종2품 가선대부로 승진한 1592년 5월 이전에는 올바른 호칭이지만, 정2품 정헌대부로 승진한 1592년 7월 이후의 약칭으로서는 잘못된 것이다. 장군이란 종4품에서 정3품까지 무인의 계급을 일컫는 용어이기 때문에 이순신장군이라고 하면 이순신이 절충장군보다 상위계급으로 진급하지 못했다는 의미가 된다.


 조선시대 관리들은 사후에도 생전의 품계나 직함이 그대로 유지되었으며 사후에 추증을 받으면 추증교지의 직함이 그의 호칭이 되었다. 특히 정2품 이상의 고급관리는 사후에 시호를 내려주어 이름 대신 부르게 하였다.
 통제사 이순신은 1598년 11월 18일 노량해전에서 전사한 직후인 그해 12월에 우의정이 증직되었고, 1604년에는 좌의정이 가증되었으며, 1643년 15대왕 광해군은 忠武公 시호를 내려준다. 순국 195년후인 1793년에 22대 왕 정조는 영의정을 추증한다.
 이와 같이 이순신은 품계 상으로는 정3품 절충장군에서 정1품 대광보국숭록대부로 승진하고, 직위상으로는 전라좌도수군절도사에서 영의정까지 오른다.

 

○ 이순신의 호칭 변천
 조선왕조실록, 이충무공전서, 징비록이나 기념비, 묘비 등에 나타난 호칭사례를 보면 전사 직후에는 ‘통제사 이순신’, ‘이 장군’으로, 시호가 내려진 17세기 중반 이후에는 ‘충무공 이순신’ ‘이 충무공’으로 호칭되다가 20세기 중엽부터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라는 약칭이 등장한다.
 6.25전쟁 이후에는 해군장병들 만이 이순신 장군 대신 ‘이순신 제독’이라는 호칭을 많이 사용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충무공’이라는 호칭은 충무공 중에 李氏가 3명이나 있으니 정확한 표현이라고 할 수 없으며, 충무공 시호도 이순신 생전에 4명, 사후에 4명 등 8명이 받았으므로 충무공 하면 이순신만을 지칭하는 용어가 될 수 없게 되었다.
 따라서 ‘충무공 이순신’이라고 해야 올바른 호칭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 이여송 제독, 진린 도독/제독관 조헌
 임진왜란 시 조선에 파병된 명 육군 최고 사령관인 이여송의 직함은 제독이었으며, 수군지휘관 진린의 직함은 도독이었다.
 - 선조수정실록 선조 26. 8: 제독 이여송이 군사를 철수해 돌아갔다.
 - 선조 27. 4. 17(을축): 이 제독의 평양에서의 전공에 대하여 비를 세우라는 전교가 있었다.
 - 선조 31. 10. 4(병진): 비변사가 도독 진린이 거짓장계를 올렸다고 아뢰다.
 그런가 하면 조선시대 각 도에 제독 장학관을 두어 향교를 순시하며 학사업무를 감독하게 하였다.
 - 징비록(이민수 옮김, 을유문화사. 117쪽): 각 도에서 의병을 일으켜 적을 친 자가 많았다. 충청도에 있어서는 중 영규를 비롯하여 전 제독관 조헌 등이 있었다.
 이처럼 이순신이 활약하던 16세기 말에 ‘제독’이라는 용어는 명 육군최고 지휘관의 직함으로 사용되었음은 물론 조선관리들의 직함으로도 사용되었으며, 조선관리들의 직함에도 제독이라는 용어가 있었음을 상기하면 ‘충무공 이순신 제독’이라는 호칭은 조선시대의 법도에 맞지 않을뿐더러 이순신에 대한 존경의 뜻은 커녕 오히려 큰 결례를 범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염려도 된다.

○ 이순신 제독, 충무공 이순신
 6.25 전쟁을 거치면서 우리군은 육군 위주로 발전하여 국방부나 합참에서 해∙공군을 타군이라고 부를 정도로 육∙해∙공 삼군 간의 균형이 깨진지 오래 되었다.
 장군에 대한 상대적인 개념으로 제독이라는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이순신이 해군의 정신적인 지주임을 천명하려 한다면 충무공 이순신 제독 보다는 이순신 제독이라고 표기하는 것이 국민의 공감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닐까? 뿐만 아니라 외국인들에게 우리의 자랑스러운 역사를 소개할 때 표현하기 쉽고 또한 그들의 이해도 한결 빠를 것이다.
 반면 임진왜란을 논하거나 조선시대 사건을 다루는 현장에서는 당연히 당시의 법도대로 ‘충무공 이순신’이라고 표기하는 것이 민족영웅에 대한 후예들의 도리가 아닌가 생각한다. 마치 세종대왕을 세종 대통령이나, 황희 정승을 황희 총리로 호칭하지 않는 것처럼.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Total 70건 3 페이지
제16호(10월) Written by 라미경 | 11-15 | 2275 비군사적 위협에 따른 중국의 군사전략 인기글
비군사적 위협에 따른 중국의 군사전략 라미경 ( 순천향대 ) Ⅰ. 들어가기 최근 비군사적 위협은 그 위협의 정도나 내용면에서 더욱 강화되고 있기 때문에 국제안보환경의 복잡성과 불확실성이 커지고 있는 추세이다. 이에 중국은 2015년 중국의 군사전략에 관한 국방백서를 발간하면서…
제16호(10월) Written by 정임재 | 11-15 | 1517 동북아 세력경쟁질서와 해양변수 인기글
동북아 세력경쟁질서와 해양변수 정임재 ​ 이 연구는 세력경쟁기 동북아 안보질서의 핵심 영향 요인들의 상대적 중요도와 우선순위를 파악하기 위해 선행 연구와 전문가 집단 조사를 통하여 핵심 영향 요인들을 도출하였고 추출된 요인들은 동일한 전문가로 하여금 AHP설문을 실시하게 하고 회수된 설문지 100부 가운데 일관성 비율…
제15호(09월) Written by 홍종태, 강희각, 정일섭, 한승조 | 10-13 | 2140 함정용 무장 전술무인기의 효익성과 획득방향 인기글
함정용 무장 전술무인기의 효익성과 획득방향 국방과학연구소 홍종태 , 강희각 , 정일섭 , 한승조 Ⅰ. 서 론 향후 연평해전이나 연평도 포격도발과 같은 상황이 또 다시 발생했을 경우 “적 근접지역에서 공격 및 정찰/감시가 가능한 무기…
제15호(09월) Written by 정삼만 | 10-12 | 1530 북한의 SLBM과 장보고-Ⅲ의 建造에 대한 含意 인기글
북한의 SLBM과 장보고-Ⅲ의 建造에 대한 含意 정삼만(한국해양전략연구소 선임연구원) 북한의 수중발사탄도유도탄(SLBM: Sumarine-Launched Ballistic Missile)에 대한 개발의 역사는 일반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오래 되었다. SLBM은 핵개발에서 畵龍點睛이다. 핵을 갖고자 하는 국가가 마지막으로 추…
제15호(09월) Written by 김덕기 | 10-12 | 1730 미국의 아시아 중시전략(Pivot to Asia Strategy)과 남중국해에서의 군사적 충돌 가능성은? 인기글
미국의 아시아 중시전략 (Pivot to Asia Strategy) 과 남중국해에서의 군사적 충돌 가능성은 ? 김 덕 기 ( 충남대학교 교수 , 해양전략연구소 선임연구위원 ) I.시작하면서 오늘날 남중국해에서 미국과 중국의 해양패권 경쟁이 가속화되고 있는 가운데 그 어느 때 보다도 군사적인 긴장이 고조 되고 있다…
제15호(09월) Written by 박휘락 | 10-12 | 1439 5차 핵실험 이후 북핵 평가와 우리 군의 대비 방향 인기글
5 차 핵실험 이후 북핵 평가와 우리 군의 대비 방향 박휘락 ( 국민대학교 정치대학원장 ) 최근 북한은 5차례의 핵실험 및 핵무기 성능평가를 통하여 핵분열무기의 개발은 물론이고 수소폭탄의 제조에도 성공하였다고 과시하였고, 2016년 9월 9일에 실시한 최근의 핵무기 시험평가에서는 핵탄두의 표준화와 규…
제15호(09월) Written by Kil, Byung-ok | 10-12 | 1142 North Korea's Ambition to "Go Nuclear" 인기글
North Korea's Ambition to "Go Nuclear" and Theoretical Resolutions for the Plausibility Kil, Byung-ok Professor, Faculty of Military Studies Chungnam National University It…
제14호(08월) Written by 김무일 | 09-21 | 2255 충무공 이순신 제독의 호칭 인기글
충무공 이순신 제독의 호칭 김무일(예 해군대령) “세종대왕함의 보유는 약 500년 전 충무공 이순신 제독이 세계 최초의 철갑선 거북선을 건조해 세계 해전사에 큰 획을 그은 것과 비견될 수 있을 것이다”. (국방일보 08. 10. 7 화 「해군의 꿈을 펼치다」) “옥포대첩 기념공원을 방문했을 때 20여회의 해전에서 승리함으로써 불패의 신화…
게시물 검색

HOME  |   BOOKMARK  |   BACK  |   CONTACT US  |   ADMIN
TOP
주소 : 대전광역시 유성구 대학로 99 (국가안보융합학부 1103호) / 대표전화 : 042-821-6082 / 팩스번호 : 042-821-8868 / 이메일 : komsf21@gmail.com
Copyright © 한국해양안보포럼. All rights reserved.[본 사이트는 개인정보 수집을 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