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호(09월) | 한산도 해전 그리고 학익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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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김무열, 예)해군대령 작성일15-10-01 18:26 조회3,624회 댓글0건본문
지난 8월 14일은 한산대첩 423주년 기념일이다. 서애 유성룡은 ‘징비록’에서 “원래 왜적들은 수륙 양면으로 군사를 합세하여 서쪽으로 치려했었다. 행장(行長)이 평양을 얻기는 했으나 외로워 더 진격하지 못했다. 우리 국가가 보전된 것은 오로지 순신이 한산도에 머물러 있으면서 적들이 서쪽으로 오려는 길을 막았기 때문이었다. 이 어찌 하늘의 도움이 아닐까 보냐?” 라고 한산도 대첩을 높이 평가했다.
한산도 해전에서 조선수군이 학익진을 어떻게 펴 싸웠는지 자세히 알아본다.
▣ 연합합대 구성
“가덕·거제 등지에서 왜선 10~30여 척이 떼를 지어 출몰한다”는 보고를 받은 이순신은 임진년 7월 4일 사전 약속한 장소에서 전라우수사 이억기와 합세하고, 다음날 5일에는 전술토의, 각 단위함대(척후장, 참퇴장, 돌격장 등)의 임무부여와 이에 따른 해상훈련을 한다.
6일에는 남해 노량에서 경상우수사 원균과 만나 협의를 함으로서 조선수군은 56척(이순신-24, 이억기-25, 원균-7)으로 연합함대를 구성한다.
7일, 고성 당포에 이르자 목동 김천손이 달려와서 왜선 70 여척이 견내량에 머물고 있다는 정보를 준다.
7월 8일(양력 8월 14일) 한산도 외항(外港)에서 조선군 56척 대(對) 왜군 73척의 전선이 대접전을 한다.
우리는 조선의 연합함대가 왜군함대를 견내량에서 한산도 외항으로 유인하여 순식간에 학익진을 형성, 적 함대를 에워싸 공격한 것으로 알고 있다.
예컨대 「여해 이순신(2008년, 위즈덤 하우스)」의 학익진 설명이다. “적선들은 한산도 넓은 바다 한 가운데 들어왔다. 바로 이때 연합함대는 약속한 신호에 따라 한 척도 지체함 없이 번개 치듯 배를 돌려 삽시간에 학이 날개를 벌리듯 전선을 양쪽에서 포위했다. 이 진형이 바로 학익진이다.”
▣ 유인전(誘引戰)
7월 15일 이순신은 한산도해전 승첩장계[見乃梁破倭兵狀(견내량파왜병장)]를 올린다.
「…견내량 지형이 매우 좁고 또 암초가 많아서 판옥전선은 부닥치게 될 것 같아 … 한산도 앞 바다 가운데까지 유인해 와서 잡아버릴 계획을 세워 먼저 판옥선 5·6척을 선봉으로 나온 적을 쫓아가 공격할 기세를 보이자, 여러 배의 왜적들이 일제히 돛을 올리고 뒤쫓아 왔습니다.」 (견내량 파왜병장1)
견내량에서 한산도 외항까지는 약 9km이다. 견내량 – 해간도 간 약 3km구간은 수로 폭이 120~130m인데 그나마 암초가 많은 가장 자리는 판옥선이 접근할 수 없다.
해간도 – 방화도 간 거리는 약 4km인데 수로 폭이 500~600m로 조금 넓어졌으나 뱀섬 등 바위섬이 산재해 전술적 기동이 곤란하다.
방화도에서 좌현으로 조금만 변침하면 한산도 외항이다. 외항은 미륵도 – 화도 간 약 3km, 미륵도 – 상죽도 간 2.5km정도인데 이 좁은 수역에서 130여 척의 적·아 전선이 혼전을 벌인다든가, 조선군 60여 척이 일시에 회전하여 학익진을 형성할 가능성은 적어 보인다.
더욱이 적이 아군을 얕보고 뒤쫓아 오게 하려면 유인선 5·6척을 제외한 50여 척의 조선함대가 적의 눈에 띄지 않아야 한다.
적에게 발각되지 않고 매복할 수 있는 곳은 통영항 입구에 있는 미륵도와 거제시의 화도밖에 없다.
판옥선 몇 척으로 왜군의 선봉대(先鋒隊)를 공격한 후 슬슬 꽁무니를 빼면서 짐짓 싸움을 피하는 양 기동하여 왜군을 한산도 외항까지 유인한 것은 병법의 교과서를 그대로 연출한 것 같아 감탄사가 저절로 나온다.
▣ 해전 실황
「…양중(洋中)으로 나와서는 학익진을 벌려 … 각종 총통을 쏘아 먼저 2~3척을 당파하자 왜적들이 사기가 꺾이어 퇴둔(退遁)하므로 … 앞 다투어 돌진하면서 화살과 화전(火箭-불화살)을 교발하니 … 적의 배를 분멸하고 적을 사살하기를 일시에 거의 다 해버렸습니다. 순천부사 권준이 층각대선 1척을 … 좌돌격장 급제 이기남은 대선 1척을 사로잡고 … 발포만호 황정록은 층각선 1척을 당파하는 등 … 여러 전선이 협공하여 왜선 큰 배 15척을 분멸하였습니다. 그 나머지의 왜 대선 20척, 중선 17척, 소선 7척 등은 좌우도의 여러 장수들이 힘을 모아 분파하였습니다.」 (견내량파왜병장2)
○ 전과(戰果) / 단위 : 척
구 분 |
대형 함대 |
중형 함대 |
소형 함대 |
계 |
좌수영 단독 |
15 |
- |
- |
15 |
좌·우수영 공동 |
20 |
17 |
7 |
44 |
경상 우수영 |
0 |
0 |
0 |
0 |
소 계 |
35 |
17 |
7 |
59 |
도 주 |
1 |
7 |
6 |
14 |
총 계 |
36 |
24 |
13 |
73 |
○ 피해(이순신함대) / 단위:명
구 분 |
전 사 |
부 상 |
비 고 |
본영 거북선 |
2 |
10 |
|
방답 거북선 |
- |
13 |
|
판옥선 22척 |
18 |
12 |
척당 : 전사 0.8명, 부상 5.5명 |
계(24척) |
20 |
144 |
|
해전실황과 전과를 보면 이순신 함대가 왜군의 전면(前面)인 화도에, 이억기(원균)함대는 왜군의 후방인 통영항 입구 미륵도에 매복한 것이 된다.
판옥석 5, 6척을 공격하여 정신없이 뒤쫓아 가던 왜군은 화도에서 10여 척의 판옥선이 나타나 도망가던 판옥선과 합세하여 학익진을 형성하기 위해 기동을 하고, 거북선 2척이 근접공격을 하여 기함이 격파돼 지휘체계가 무너지자 왜군은 사기가 꺾여 도망가기 시작한다.
이때에 학익진을 형성한 판옥선들이 화살과 화전을 교발하여 일시에 왜 대선 15척을 분멸한다.
이어서 미륵도에서 나온 이억기 함대가 왜군의 후미 쪽을 에워싸 이순신 함대와 협동으로 왜선 44척을 분멸한다.
화살과 화전으로 적을 사살하고 적선을 불태웠다는 것은 적선과의 거리가 화살의 살상 거리인 200m 내외 근거리에서 전투가 벌어졌음을 의미하고, 거북선 2척에서 25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것을 보면 왜군 조총의 살상 거리인 100m까지 근접하여 전투를 했다는 것이다.
게다가 좌돌격장이 대선 1척을 사로잡을 정도로 왜군은 전투 초기에 전의(戰意)를 잃고 어떻게 하면 살아서 도망갈 수 있을까 궁리만 한 것으로 보여진다.
전투 초기부터 왜군 400여 명은 형세가 불리하고 도망가기가 어렵다는 것을 인지하고 배를 버리고 거제시 화도에 상륙한 것을 보면 사기가 극도로 저하됐음을 알 수 있다.
그 나머지 14척은 접전할 때 뒤떨어져 있다가 배를 불태우고 목 베어 죽이는 꼴을 바라보고는 노를 재촉하여 견내량 쪽으로 도망간다.
결론적으로 조선수군은 단 1척도 손실 없이 왜선 59척을 격파했다는 것은 조선군의 총통(銃筒)과 왜군의 조총은 파괴력이나 사거리 면에서 비교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시켜준 해전이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덧붙여 거북선의 선체가 철로서 방호된 것이 아닌, 목재로 돼있음을 알 수 있다.
게다가 이순신은 평소에도 꾸준히 활 쏘는 것은 물론, 군관들을 시켜 편을 나누어 활을 쏘게 하는 등 부하 장병들의 활 쏘는 훈련을 게을리 하지 않았음을 우리는 난중일기 곳곳에서 볼 수 있다.
특히 당황포 승첩을 아뢰는 계본(1594. 3. 10.)에서 “그날(3월 5일) 수군 총원이 모두 합세하여 포성이 하늘을 진동케 하며, 동서로 진을 바꾸면서 엄격한 모습을 보였더니 가덕, 거제 등지에 운거하여 복병하고 있던 적들이 공격 당할까봐 모두 제 손으로 불을 지르고 굴속으로 들어가 밖에는 그림자조차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라는 보고서는 최고도의 전력을 유지하기 위해 평소에 얼마나 많은 땀을 흘렸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잘 훈련된 군대가 승리하는 것은 당연한 결과가 아니겠는가.
▣ 원균함대 전과는 ZERO
「신의 여러 장수들이 벤 왜적의 머리 90급을 올려 보냅니다. 신이 당초에 군사들에게 약속할 때에 공훈을 바라는 생각으로 머리 베는 것만을 서로 경쟁하다가는 도리어 해를 입어 사상당하는 예가 많으므로 비록 머리를 베지 않아도 역전(力戰)한 자로서 제1의 공로자로 정한다고 두세 번 강조하였기 때문에 목 베인 수는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공로를 세운 경상도의 여러 장수들은 소선을 타고 뒤에서 관망하던 자로 적선 30여 척이 당파 당하자 운집하여 머리를 베었습니다.」(견내량파왜병장3)
이순신 함대는 전과에 비해 목 베인 수는 얼마 되지 않는 이유를 상세히 설명하면서 원균함대는 전과가 전무(全無)하다고 아뢰고 있다.
그래서일까? 난중일기 임진년 6월 11일 ~ 8월 23일 까지의 기사가 빠졌다.
정유년 2월, 이순신이 체포되어 조사 받을 시 세 번째 죄목 “남의 공을 빼앗고 남을 죄에 빠트린 죄”에 해당되는 내용의 일기가 당연히 조정에 제출되었을 것이다.
죄인(?)의 일기를 가져간 후 누가 되돌려 주겠나? 빠질 수 밖에 없다.
전쟁영웅들을 견제한 무능한 통치자 때문에 중요한 역사기록이 없어진 사실을 접할 때마다 아쉽다는 생각이 들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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